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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갈수록 팍팍해지는 직장문화

[이규섭 시인님] 갈수록 팍팍해지는 직장문화

by 이규섭 시인님 2019.07.05

폭탄주는 회식의 통과의례였다. 컵에 맥주를 7할 정도 따른 뒤 양주를 채운 작은 잔을 컵에 퐁당 담근다. 맥주와 양주가 어우러져 주황색 물무늬로 번진다. 제조자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먼저 마신 뒤 잔을 비웠다는 표시로 머리에 붓는 시늉을 하며 딸랑딸랑 흔든다. 참석자들은 박수로 호응한다. 폭탄주는 선후배 구분 없이 앉은 순서대로 돌아간다. 주신(酒神)의 명령을 수행하듯 거절할 수 없는 게 폭탄주의 불문율이다.
폭탄주 제조 기법도 다양하다. 회오리 폭탄주, 물레방아 폭탄주, 금테 폭탄주, 거품 폭탄주 등 바텐더 보다 더 능수능란하게 제조 솜씨를 뽐내던 동료도 있었다. 폭탄주의 대중화로 양주 대신 소주를 탄 소맥폭탄주가 일반화 됐다. 요즘은 순한 술 기호에 맞춰 얼음을 채운 맥주잔에 커피를 탄 ‘고진감래주’, 소주와 홍초를 섞은 ‘홍익인간주’ 등 진화를 거듭한다.
폭탄주가 회식 문화를 좌우하던 초창기 땐 독한 술을 싫어하는데다 강제성이 강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차츰 선호하는 쪽으로 기운 건 술자리서 유난하게 꽁무니를 빼는 얌체형도 폭탄주 불문율은 피해갈 수 없는 공평성이다. 회식을 주관하는 위치에 오를수록 폭탄주의 또 다른 매력은 2차에 빠질 인원을 자연스럽게 걸려낼 수 있다는 점이다. 회식은 대게 생맥주 집을 거쳐 노래방에서 방점을 찍는다. 회식은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며 화합을 도모하는 조직문화의 꽃이다. 친밀도가 높아져 공감대가 형성된다.
이달 16일부터 시행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앞두고 조직 내 회식 문화가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 회식에 빠지는 사람은 알지”한다거나 “술 왜 안 마셔”했다간 괴롭힘 금지법에 걸린다. 직장 내 회식문화가 세대 갈등의 원인 중 하나로 떠올랐다. 예전엔 직장 상사 한마디엔 권위가 있었다.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위계질서에 익숙하여 하기 싫은 것도 감수했다. 상사의 리더십은 근무 환경을 좌우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어떤가. 자신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등 나의 행복에 중점을 둔다. 갓 들어온 신입 사원도 데이트 약속을 핑계로 회식에 빠진다.
‘괴롭힘 금지법’의 취지는 좋아도 구성원 간 소통이 단절될 우려도 있다. 위계질서는 평등화에 밀려 조직의 틈이 벌어질 수 있다. 갑질 증거 확보를 위해 녹음을 할 수 있으니 말조심을 해야 한다. 업무 지시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법 조항 또한 포괄적이어서 애매하다. 고용노동부가 괴롭힘 예시 매뉴얼을 내놨지만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개인사에 대한 뒷담화나 소문을 퍼뜨려도 저촉되는 데, 은밀하게 나눈 뒷담화 증거를 녹음하거나 제3자가 고자질해야 성립된다. 다른 사람 앞에서 모욕감을 주는 언행도 모욕의 정도가 사람마다 달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괴롭힘 판단도 헷갈린다. 행위에 대한 피해자의 반응과 정도, 일회적인지 지속적인지 행위 구간을 구체적으로 참작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도 녹록지 않다. 갈수록 인간관계가 삭막해지고 끈끈한 동료애마저 희석되어 업무 기능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