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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하늘의 멍을 풀어드리자

[한희철 목사님] 하늘의 멍을 풀어드리자

by 한희철 목사님 2020.01.22

‘가슴의 멍’이라는 동화를 읽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가슴의 멍처럼 남아 있습니다. 사라지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은 채로 말입니다. 개인의 아픔이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겪어온 아픔이기도 한 까닭일지도 모릅니다.
열다섯에 시집을 와 두 살 더 어린 남편과 살기 7년, 그동안에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낳은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며 만주로 떠났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이 답답할 때면 두 주먹으로 당신 가슴을 쳤습니다.
큰 아들 한동이는 철로 놓는 일에 부역을 나갔다가 하필이면 오줌을 눈다는 것이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일본 순사 얼굴에 대고 누었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은 뒤 팥죽 사발처럼 엉겨 붙은 눈과 코를 다시 뜨지 못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을 파고 한동이를 묻던 날, 어머니는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마시고는 당신 가슴을 쇠가죽 북처럼 펑펑 쳤습니다.
전쟁이 나자 둘째 이동이는 몽둥이를 들고 동네를 때려 부수더니 마을을 떠나 북쪽으로 가버렸습니다. 말리는 어머니 말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동이가 허둥지둥 떠난 날 밤, 어머니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당신의 맨가슴을 쳤습니다.
방앗간 집에 시집갔던 분이가 인왕산 바위만큼 부른 배를 앞세우고 와서는 숨이 진 까만 계집애를 낳고는 다시는 저를 찾지 마시라고, 퉁퉁 부은 얼굴로 말없이 도망치듯 떠난 날에도 어머니는 당신 가슴만 펑펑 소리 나게 쳤습니다.
남편이 떠난 뒤에 태어나 아버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막동이를 위해 어머니는 뒤뜰에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 하늘에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제발 막내자식 하나만은 살려달라고 말이지요. 튼튼하게 잘 자란 막동이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떠났다가 화약이 폭발하는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막내마저 떠났을 때 어머니는 머리 풀고 뒤뜰에 나가 살쾡이처럼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 이놈 나오니라. 내 좀 보자. 니가 나와 무신 웬수라꼬 이리도 모질단 말이냐?” 하느님은 어머니를 당신 곁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눈을 뜬 어머니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시며 “너는 내 가슴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으냐?”고 했습니다. 보니 하느님 가슴엔 시퍼런 멍이 가득했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난 기가 막힌 일들을 생각할 때 가슴 아픈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이 퍼렇게 멍이 들었다 싶습니다. 하지만 멍이 든 것은 우리들 가슴만이 아닙니다. 멍든 가슴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는 하늘의 가슴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 따뜻한 손길과 마음으로 서로의 가슴에 남은 멍을 지워 맑은 숨을 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늘의 멍도 풀어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