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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포근한 겨울...설 분위기 느슨

[이규섭 시인님] 포근한 겨울...설 분위기 느슨

by 이규섭 시인님 2020.01.28

설 무렵은 늘 추웠다. 동장군(冬將軍)의 맹위에 산천이 꽁꽁 얼어붙어 숨죽였다. 북풍한설(北風寒雪) 휘몰아치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의 혹독한 겨울이었다. 눈은 허리춤까지 쌓여 가래로 길 양쪽에 밀어 이웃과 소통했다. 진눈깨비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는 생가지가 찢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문풍지는 칼바람에 밤마다 잉잉거리며 울었다.
마당에서 데운 물로 세수를 하고 문고리를 잡으면 손바닥이 쩍쩍 달라붙었다. 생솔가지 타는 듯한 매캐한 연기를 마시며 부엌에서 설음식을 준비하던 그 시절 모든 어머니들과 누이들의 모습은 생손을 앓는 아픔으로 기억된다. 무명옷에 버선발, 머리에 흰 수건 두른 채 살을 에는 강추위를 견디며 차례 준비를 한 이 땅 어머니들의 마음은 불잉걸처럼 뜨거웠다. 설음식에 푸근함과 넉넉한 맛이 담긴 이유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인간미가 풍기듯,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 난다. 차례를 지내고 얼얼한 추위 속에 세배를 다니면 설 분위기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겨울 날씨의 반란으로 포근해지자 설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설 연휴도 평년 기온을 웃돌 것이란 예보다.
겨울 중 가장 춥다는 소한(小寒) 절기엔 온종일 비가 내렸다. 마치 봄비 같아 우산을 쓰고 근린공원을 산책했다. 한낮 기온이 23도까지 치솟은 제주에는 유채꽃이 만발했고, 관람객들이 반팔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3년 전 겨울도 따뜻했다. 재작년엔 12월 들어 한강이 얼어붙을 정도로 혹독했다. 작년에 포근한 겨울 속에 서울 적설량은 0㎝를 기록했다. 집 계단과 골목의 눈을 쓸어 본지 꽤 됐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로 겨울축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산천어축제, 눈 축제, 빙어축제 등 눈과 얼음을 주제로 한 겨울 축제가 열리지 못했다. 보고 즐기는 축제에서 참여하는 관광으로 축제로 자리매김했으나 기후에 의존한 축제의 한계를 드러냈다. 기후에 의존하지 않는 겨울축제 소재 개발이 절실해졌다.
봄 같은 겨울에 농부들도 걱정이다. 작물이 본격적인 생육을 시작하는 2∼3월까지 이런 현상이 이어지면 사과와 배, 포도와 복숭아 농사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외래종 꽃매미는 코끝 매운 겨울은 서식이 어렵지만 이상고온이면 나무에 붙어 겨울을 무사히 나 피해가 극심하다. 꽃매미는 과일의 수액을 빨아먹어 말라죽게 하거나 분비물을 배설해 상품성을 떨어뜨린다. 몇 해 전 집에서 무성하게 키우던 머루넝쿨을 꽃매미의 극성으로 베어버렸다.
이상기온으로 지구촌 곳곳이 몸살을 앓는다. 인도는 차가운 공기가 전국을 감싸 추위와 스모그에 시달린다는 소식이다. 수은주가 48.9도까지 치솟은 시드니 팬리스는 살인적 무더위에 곤욕을 치른다. 5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호주 산불도 온난화와 이상 고온이 직접적 원인으로 꼽힌다.
날씨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낮게 드리운 잿빛 하늘을 보면 우울해지고 미세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가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매운 겨울 속에 맞는 설은 엿치기 같은 긴장이 탱글탱글하지만, 나른한 기후 탓에 설 분위기마저 느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