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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대답하지 못한 이유

[한희철 목사님] 대답하지 못한 이유

by 한희철 목사님 2019.03.13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이름과 얼굴이 있습니다. 금방 대한 얼굴을 잊어버리고 이름을 잊어버리기 잘하는 터에, 오래된 이름과 얼굴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딱히 설명하기가 어려운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게는 김천복 할머니가 그렇습니다. 오래전 강원도 작은 마을에서 함께 살던 할머니입니다.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할머니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젊으셨을 땐 참 얼굴이 고왔겠다 싶은데도 당신은 굳이 당신 얼굴을 두고는 서리 몇 번 맞은 호박덩이 같다고 했습니다. 입가엔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지만 당신 죽은 뒤 가슴을 열어보면 온통 숯검정 밖에는 없을 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강가 밭에 나와 일하고 땅거미 밟으며 돌아가는 할머니 등에는 대개 보따리가 얹혀 있었습니다. 새가 나는 모양을 아이에게 가르칠 때 했다는 질라래비 훨훨처럼 앞뒤로 손 연신 흔들며 노 젓듯 휘휘 어둠 저으며 당신 집으로 오르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마치 달팽이가 제 집을 이고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평생 제 집 버리지 못하는 달팽이처럼 말이지요.
모처럼 할머니가 장에 다녀오시는 날엔 양말 두어 켤레라도 사가지고 사택에 들르시곤 했습니다.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었지요. 할머니가 들르시면 습관처럼 커피를 타드리고는 했습니다. 할머니가 커피를 좋아하시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커피를 마실 때면 할머니가 습관처럼 물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커피가 유난히 맛있다며 커피를 어떻게 탄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었지요. 커피가 맛있을만한 이유는 따로 없었습니다.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커피에다 단 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설탕을 조금 더 넣었을 뿐이었으니까요.
할머니는 여러 번 같은 질문을 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도록 한 번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설탕을 조금 더 넣는 비결이 무엇 대단한 비법이라고 알려드리지 못할 까닭이 되겠습니까만, 대답을 하지 못한 까닭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할머니는 혼자 사셨습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는 대부분의 커피를 혼자서 마셨을 것입니다. 일 마치고 돌아와서, 비 오는 날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때로는 밥사발에, 때로는 종지에 타서 혼자 마시는 커피가 어디 맛이 있겠습니까? 그저 허전하고 막막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을 뿐이었겠지요.
할머니가 거듭 알고 싶어 했던 맛있는 커피의 비결은 필시 함께 마주 앉아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했던 것은 행여 그런 말이 할머니 마음속에 똬리처럼 자리 잡은 생의 외로움을 건드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