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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잊을 걸 잊고 새길 걸 새김으로

[한희철 목사님] 잊을 걸 잊고 새길 걸 새김으로

by 한희철 목사님 2019.05.08

갈수록 기억력이 감퇴되어 고민을 하는 이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단어나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그래도 가벼운 일, 때로 건망증은 엉뚱한 실수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잦아집니다.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리고 낙심하는 일도,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을 되찾아 기뻐하는 일도 조금씩 늘어납니다.
기억력이 점점 약해져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아무도 모르게 기억력을 강화시켜주는 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3개월 정도를 꾸준히 다니니 눈에 띌 만큼 기억력이 좋아졌습니다. 좋아진 기억력을 자랑하고 싶을 만큼 말이지요.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아내가 부탁을 했습니다. 저녁에 손님들이 오시기로 했으니 조금 일찍 퇴근하면서 마트에 들러 장을 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건네준 메모지에는 무려 열댓 가지의 물품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기억력 강화 훈련을 받은 남편은 한눈에 메모된 내용을 읽고는 보란 듯이 메모지를 아내에게 건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씩 방금 메모지에 적혀 있던 물품 내역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잊기를 잘하던 남편의 달라진 모습에 아내는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퇴근을 해서 돌아왔을 때 아내가 대뜸 물었습니다. 실은 하루 종일 궁금했던 일이었습니다. 과연 남편이 장을 다 봐 올지, 그토록 잊기를 잘하던 남편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는지 등이 말이지요.
아내의 질문 앞에 남편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은 어떤 물건도 사 오지를 않았습니다. 아침에 아내가 적어준 내용은 지금도 얼마든지 외울 수가 있지만, 남편이 깜박한 것이 있었습니다. 마트에 들러 장을 봐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만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은 사소한 것은 기억하면서도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1921년 미국 보스턴을 방문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한 기자가 “음속은 얼마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그런 것은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정보를 기억하고 다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합니다.
망각이나 건망증이 인지능력의 결함이 아니라, 뛰어난 지적 능력의 증거라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주목을 받고 있다 합니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는 상세하게 기억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니, 건망증으로 속상해하던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난날의 일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보다는 잊을 걸 잊고 새길 걸 새기는 것이 소중한 관계를 지키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어찌 그것이 마음대로 될까 싶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필요하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