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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첨성대에 걸린 신라의 달

[이규섭 시인님] 첨성대에 걸린 신라의 달

by 이규섭 시인님 2019.10.25

늙은이 다섯 명이 의기투합했다. 추억을 추억하는 1박 2일 가을여행을 떠나자고. 수학여행의 메카 경주로 가자는데 쉽게 동의했다. 동행자들의 출생 지역은 서울, 경북, 경남, 전라도와 충청도로 각각 달라도 공통점은 수학여행을 경주로 간 것이다. 짧은 일정이지만 열차표와 숙소, 시티투어 예약 등 준비가 녹록지 않다. 주말을 피해 주초에 일정을 잡으니 열차표도 할인되고 관광지 동선이 느슨하여 좋았다.
함월산(含月山) 기림사(祇林寺)는 수학여행 일정에 없었고 첫 방문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833호)의 퇴색한 단청엔 세월의 무게가 송홧가루처럼 곱게 묻어난다. 소담한 꽃살문은 문외한이 봐도 미학이다.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꽃살문은 섬세하게 바느질한 무채색의 조각보 같다. 채색되지 않은 채 나뭇결의 요철이 그대로 드러나 단출 하면서 은근한 멋이 풍긴다. 함월(含月)의 달이 꽃살문에 비치면 얼마나 황홀하고 설렐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은 여인의 긴 머릿결처럼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기림사는 불국사를 비롯한 인근 30여 개의 절을 말사로 거느렸던 고찰이었다.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가 됐으니 사찰의 팔자도 사람 팔자와 다를 바 없다.
석굴사원 골굴사(骨窟寺)도 처음 들린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선무도 자세의 동상들이 맞아준다. 선무대학 건물과 요사채를 지나 가파른 언덕에 오르니 기림사 대적광전 보다 규모가 작고 아담한, 같은 이름의 대적광전이 둥지를 틀었다. 뒤쪽의 계단을 타고 오르면 석굴에 새겨진 마애여래불이 대왕암이 있는 동해를 굽어보고 있다. 골굴사는 원효대사의 마지막 열반지로 신라의 호국불교정신과 원효의 정토사상을 계승한 사찰이다. 선무도는 명상과 무술, 요가 등을 융합한 수행법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선 승병들의 무술이다.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외국인들도 눈에 띈다.
천년고도 경주는 밤이면 화려하게 변신한다. 수학여행 때 안압지의 명칭은 ‘동궁과 월지’로 바뀌었고, 연못에 비친 전각과 나무는 불빛에 영롱하게 물무늬진다. 숲에 걸린 달은 인공의 조명 달로 착각했으나 음력으로 환산해보니 구월 열엿새 둥근달이다. 첨성대를 비추는 달은 신라의 달이다. 천체의 움직임과 별자리를 관측하던 첨성대가 제대로 달빛을 관측하는 모양새다. 첨성대는 여덟 가지 색색 옷을 갈아입으며 신라의 꿈을 재현한다. 고즈넉하고 신비감이 감돈다. 야간 조명을 받은 고분은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아련하다. 월정교는 지나치게 현란하여 사실감이 떨어지고 천년의 향기와 거리가 멀다.
이른 시각, 석굴암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중학생들의 재잘거림이 토함산의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 같다. 유럽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의 현상이라고 한다. 불국사 다보탑 기둥 중앙부에 입이 떨어져 나간 사자 상 한 마리를 수학여행 때는 스쳐 지나갔으나 이번엔 눈에 들어왔다. 네 마리 중 세 마리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사자상이 아니라 ‘해태’라는 주장도 있다. 대웅전 대들보의 코끼리도 이번에 처음 봤으니 여행의 맛이 깊어졌다. 추억을 만나러 갔다가 추억을 만들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