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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산 자를 살리는 죽은 나무, 산자를 죽이는 무덤

[강판권 교수님] 산 자를 살리는 죽은 나무, 산자를 죽이는 무덤

by 강판권 교수님 2019.10.28

삶과 죽음은 일상이다. 삶과 죽음을 일상으로 여기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편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와주는 경우도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죽이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칭찬받을 일이지만 후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일상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것조차 아무런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다. 나는 인근 산에서 종종 이 같은 일을 목격한다.
인근 산에는 묘소가 적지 않다. 어느 묘소를 가리지 않고 묘소 주변의 나무들은 천명대로 살기가 어렵다, 묘소의 후손들이 무자비하게 베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묘소 앞을 지나다 보니 갈 때마다 반겨주는 듯한 오동나무가 말라있었다. 가서 보니 곰팡이까지 생겨서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오동나무를 죽인 사람은 분명 묘소의 후손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일 사람이 없다. 묘소의 후손이 오동나무를 죽인 이유도 간단하다. 잎이 아주 큰 오동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묘소의 잔디 성장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오동나무 옆에는 아주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다. 그 소나무는 묘소 반대쪽으로 기울어 살고 있다. 최근에 누군가가 소나무를 위해 죽은 소나무를 잘라 만든 토막을 받쳐주었다. 나는 거의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반대의 사례를 보면서 죽은 자와 산 자의 몫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인류 역사상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리는 경우와 반대인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인류의 불행은 언제나 죽은 자가 산 자를 죽이는 사례 때문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살아 있는 자를 죽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다. 죽은 자를 위해 산자를 죽이는 자도 나름의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도 죽은 자가 산 자를 죽인다면 용서받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조상을 위해서 살아 있는 나무를 죽이는 것은 나무를 생명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나무를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했다면 그렇게 쉽게 나무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오동나무는 인간이 소중하게 여긴 나무 중 하나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큰 인물이 등장하기 바라는 뜻에서 오동나무 혹은 벽오동을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심었다. 우리나라 정원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전남 소쇄원의 대봉대가 그중 한 곳이다. ‘봉새를 기다는 대’를 의미하는 대봉대 근처에는 아직 어리지만 한 그루 벽오동이 살고 있다.
오동나무는 한 해를 가늠하는 나무였다,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온 것을 알았다. 가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이다. 이처럼 오동나무는 한 해를 예측하는 희망의 나무였지만 무덤의 후손은 오동나무를 저주의 나무로 여겼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자만큼 불행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저주로 자신이 싫어하는 자를 죽일 수 있지만 저주하는 자도 올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맹자는 옳은 것을 축적하는 것을 호연지기라 불렀다. 매일 호연지기를 기르면 누구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나무를 만나 좋은 기운을 받으면 곧 호연지기의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