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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비움의 계절, 한 줌 바람 되어

[이규섭 시인님] 비움의 계절, 한 줌 바람 되어

by 이규섭 시인님 2019.11.01

한 발 늦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하늘을 가리고, 은행 숲이 황금빛 융단을 깔고 반겨줄 줄 알았다. 웬걸 은행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은행나무 가지를 스쳐가는 바람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몇 년을 벼르다 갔는데 절창이 끝나고 추임새 여운만 남은 판소리 뒷마당 같아 씁쓸하다.
강원도 홍천 내면 은행나무 숲은 해마다 10월 한 달만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10월을 일주일을 남겨 두고 찾아갔는데 강원도의 가을은 나의 예상 보다 빠르게 스쳐간다. 부지 4만㎡에 은행나무 2000여 그루가 5m 간격으로 오와 열을 맞춰 열병식 하듯 가지런하게 심어져 있다. 노란 단풍이 물결치는 은행잎이 아닌들 어떠랴. 은행나무 숲을 거닐고 있다는 것만도 여유가 묻어난다.
수령은 30여 년 됐는데 나무들의 몸집은 왜소하다. 은행나무는 암나무가 있어야 가지를 넓게 뻗어 풍성한 맛을 느낄 수 있는 데 은행의 고약한 냄새를 없애려 수나무만 심어 풍성한 맛이 덜하다. 은행나무는 역사가 오래된 살아 있는 화석으로 꼽힌다. 열매는 살구 모양으로 딱딱한 중간 열매가 은빛이어서 은빛살구(銀杏)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공해에 강해 가로수로 심은 지자체가 있으나 가을이면 고약한 냄새로 골치를 앓는다.
은행나무 숲은 1985년 40대의 독농가 주인이 위장병을 앓던 아내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삼봉약수의 효험을 듣고 인근에 터를 잡아 심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은둔의 숲은 2010년부터 일반에 공개하면서 입소문을 타고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지자체에서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주차장을 조성하고 관광안내소와 느린 우체통을 운영하며 관광지의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주민들이 재배한 농산물과 먹거리를 팔아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보탬이 된다. 늦가을 평일인데도 1차선 도로는 차량들이 길게 줄지었다.
은행나무 숲을 감싸고 흐르는 내린천의 지류 계방천은 유리처럼 투명하게 바닥이 훤하게 비친다. 열목어가 서식하는 청정지역으로 시리도록 맑다. 빨갛고 노란 단풍잎이 물결에 자수를 놓는다. 내친김에 삼봉약수의 효험을 확인하려 길을 나섰다. 가칠봉(1240m) 너른 품에 조성한 삼봉자연휴양림 가는 길은 호젓해서 좋다. 오색 단풍이 마지막 불꽃을 피우거나 흑갈색으로 변해 떨어지고 있다.
안내소에서 1㎞ 올라가니 천연기념물 제530호로 지정된 삼봉약수 안내판이 보인다. 작은 내를 끼고 있는 약수터는 철분이 녹아 붉은빛을 띤다. 마그네슘, 칼슘, 철분, 불소 등 15가지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위장병, 당뇨, 피부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쓰여 있다. 세 개의 독에 고인 약수를 마셔보니 탄산수에 비릿한 느낌이다.
11월은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 사이 바리톤 음역과 같다. 나무들은 옷을 벗고 황금물결 일렁이던 들판은 민낯을 드러낸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가진 자들의 욕망과 위선, 세상을 희롱하는 요설의 난무를 보면서 한 줌 바람이 되고 싶다. 비움의 계절, 허욕을 내려놓고 삶의 속도를 느리게 조절하며 겸허의 지혜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