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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전거지와 이백충

[한희철 목사님] 전거지와 이백충

by 한희철 목사님 2019.11.20

새로 이사를 한 교우 가정이 있어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새로 이사를 한 곳은 새로 지은 아파트였습니다. 아파트도 진화를 하는지 새로 지은 아파트는 공간 구조가 달라 보였고,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편리한 기능들이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차 한 잔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 주변의 집과 관련하여 초등학교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아파트로 이사를 한 것도 그런 말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빌거지’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빌거지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습니다. 조심스레 뜻을 물었는데 설명을 듣고는 기가 막혔습니다. 빌거지는 ‘빌라에 사는 거지’라는 뜻이었습니다. 세상에 맙소사!
그러나 놀라운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지는 빌거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거지와 월거지도 있었습니다. 빌거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전거지와 월거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이 되었는데, 짐작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전거지는 전세를 사는 거지, 월거지는 월세를 사는 거지라는 뜻이었으니까요.
마음이 처연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는 집을 두고 이런 말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말 속에 담긴 폭력성의 정도가 너무 심하여 섬뜩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말들이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 속상함을 지난 절망감이 밀려드는데,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는 듯이 집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졌습니다.
‘엘사’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는데, 당연히 디즈니 영화 주인공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새로운 말들을 지어내는 아이들의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인데, 내게는 상상력을 이런 일에 사용하는 것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누군가를 향한 혐오가 담긴 말은 더 있었습니다. 아파트와 빌라, 전세와 월세 등 주거 형태를 두고 지어낸 말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모의 월 소득의 정도에 따라 ‘이백충’ ‘삼백충’이라는 말도 쓰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백충과 삼백충은 한 달 수입이 200만원과 300만원이 안 되는 사람을 벌레(蟲)에 빗대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우리의 난폭함과 황량함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대번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나쁜 일이라고, 아이들만 탓할 일은 결코 아니지 싶습니다. 아이들은 누군가를 통해 삶의 가치와 언어를 배우는데, 부모와 어른들입니다. 어른들이 물려준 잘못된 가치관이 아이들의 병든 가치와 언어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나와 너를 가르고 조롱하는 일은 결코 중단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