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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박사님] 백비(白碑)* 앞에서

[김민정 박사님] 백비(白碑)* 앞에서

by 김민정 박사님 2019.12.09

전남 장성 황룡면 박수량 묘소에는
비문 없는 비석 하나 놀랍게도 서 있네
심성이 맑은 사람만 / 깊은 뜻을 읽어 낼까?

명문장 나열해도 나타낼 수 없는 사연
글자 없이 백비만 세우라 명하셨나
청백리 그 한 마디가 / 듣고 싶은 요즈음
- 양계향, 「백비 앞에서」 전문

*백비(白碑) : 조선시대 3대 청백리의 한 사람인 박수량 묘소에는 비문이 새겨지지 않은 비석이 서 있다. 명종임금께서 비문을 새기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비문이 새겨지지 않은 비석을 백비라고 한다. 청렴한 사람에게 세워주는 비석이다. 그리고 새기고 싶은 말이 너무 많거나 무슨 말을 새겨야 할지 모를 때 백비를 세우기도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권세욕, 부욕, 명예욕 등을 이겨낼 수 있다면 인간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산티아고 노인은 하바나에서 고기를 낚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어부이다. 일생을 바다에서 보낸 그는 늙고 쇠약해지지만 이웃 소년 마놀린과 함께 배를 타며 어부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소년을 다른 배의 조수로 보낸다. 노인은 홀로 먼 바다에 나가게 된다. 그의 낚시에 돛새치라는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걸린다. 그 과정에서 노인은 힘을 다해 큰 돛새치를 잡게 되고 그것을 끌고 육지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것을 끌고 오는 동안 상어떼가 달려들어 노인은 다시 한 번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 노인이 가까스로 항구에 닿았을 때 그가 잡은 고기는 상어떼에 물어 뜯겨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었다. 이야기의 귀결만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헤밍웨이의 허무주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물고기와 인간의 끈질긴 대결에서 헤밍웨이가 강조하는 것은 승부 그 자체가 아니라 ‘누가 최후까지 위엄 있게 싸우느냐’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물고기와 싸우면서 노인이 되뇌는 말,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시한적 생명은 쉽게 끝날 수 있지만 인간 영혼의 힘, 의지, 역경을 이겨 내는 투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지속되리라는 결의이다. 노인이 죽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상어와 싸우며 하는 말,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인은 고통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침착성과 불굴의 용기를 보이며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을 가르쳐 준다.
이 외에도 이 작품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교훈을 준다. 상어떼처럼 살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상어떼는 긴박하고 위험한 투쟁을 택하기보다는 남의 전리품을 약탈하려는 천박한 기회주의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고 기회만 노리다가 남의 것을 새치기하는 야비한 기회주의가 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이야 아파하든 말든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남을 짓밟는 비열한 편의주의자, 그리고 어차피 세상은 혼자 싸우기에는 너무 무서운 곳이라고 단정 짓고 불의인 줄 알면서도 군중에 야합하는 못난 패배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양계향 선생님의 「백비 앞에서」라는 작품을 읽으며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