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이미지

오피니언

오피니언

[이규섭 시인님] 혼자가 혼자에게 말 걸기

[이규섭 시인님] 혼자가 혼자에게 말 걸기

by 이규섭 시인님 2020.01.17

나이 드는 만큼 걱정도 는다. 늙은이 몇 사람만 모여도 삐걱거리는 세상을 질타하느라 술자리가 시끄럽다. 청력이 떨어지는 만큼 목청이 높아져 주위의 눈총을 받는다. “뉴스를 안 보면 되지, 왜 보면서 스트레스 받고 열 받는가?” 침묵을 지키던 지인이 일갈한다. ‘도사’같은 말씀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뉴스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 그는 뉴스를 안 본다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시니컬하다.
“남들이 뉴스나 유튜브를 볼 때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는 역공에 “클래식을 듣거나 DVD로 흘러간 영화를 본다”고 응수한다. “클래식”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일상에 쫓기고 바쁘다는 핑계로 클래식 음악을 들은 지 아득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제법 비싸고 덩치 큰 오디오 시스템을 갖춰놓고 가끔 들었는데 언제 왜 없앴는지 기억조차 아득하다. CD가 출시될 때 클래식 전집을 샀지만 지금은 책장 귀퉁이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말을 들은 며칠 뒤 컴퓨터용 스피커 두 개를 적당한 높이로 벽에 걸고 유튜브를 통해 클래식을 듣는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게 된 계기는 병영생활을 서울에서 할 때다. 외출을 나오면 종로 1가 영안빌딩 4층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 들러 베토벤과 쇼팽, 모차르트와 브람스를 만났다. 그곳은 병영생활의 애환을 품어주던 아늑한 둥지였다. 눈을 감으면 시공을 자유롭게 떠도는 외로운 나의 영혼과 만나는 판타지아에 빠져든다. 즐겨 듣던 신청곡은 베토벤의 ‘로망스 제2번 F장조’. 아름답고 서정적인 클래식 소품의 백미다. 감미로운 선율이 안개꽃으로 자욱해진다.
말과 글이 공해가 된 세상에 ‘말 없는 예술’을 즐기는 중년 남성들이 부쩍 늘었다는 보도다. 대중적이고 동적(動的)인 영화, 가요, 뮤지컬 보다 미술과 무용, 클래식 음악과 박물관 등 비(非)언어 예술을 선호하는 경향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듣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는 게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별 관계없이 20대(29%)가 가장 많이 관람하지만, 자주 방문한다는 남성 응답자 가운데 40대(39.2%)와 50대(38.2%)가 20대(24.9%)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말과 글을 피해 여가 생활을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한 손엔 휴대폰, 한 손엔 셀카봉 들고 나홀로 떠나는 ‘혼행족’도 늘어나는 추세다. 친구 혹은 가족 대신 모바일폰을 동반자 삼아 떠나는 ‘모바일문(Mobilemoon)’이 새로운 여행트렌드로 떠올랐다. 항공편부터 숙소, 교통수단까지 스마트폰으로 예매하고 맛집이나 볼거리도 검색하여 해결하니 불편함이 없다.
이병률 시인은 산문집 ‘혼자가 혼자에게’서 나홀로 여행을 권한다. 홀로 떠나면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여기에서도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 따위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고 한다. 나만의 시간에 나에게 슬쩍 말을 걸어보자.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를 털어놓으면 응어리진 주름살이 펴지며 삶의 무게가 한결 가뿐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