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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발 묶인 여행, 추억 속으로

[이규섭 시인님] 발 묶인 여행, 추억 속으로

by 이규섭 시인님 2020.07.30

장마전선이 오르내리며 미세먼지를 씻어간 탓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구름처럼 유유히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해마다 7월말 8월초에 떠났던 친인척 휴가도 코로나로 취소했다. 발 묶인 해외여행을 추억 속으로 떠난다. 지난해 다녀온 크로아티아 관광·휴양도시 스플리트(Split) 노천카페에서 아드리아 해를 아득히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던 게 설렘으로 다가온다.
스플리트에 관광객이 몰리는 건 1700여 년 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궁전의 영향이 크다. 고대 로마의 대표적 유적인 이 궁전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쪽빛 바다와 눈부신 태양, 야자수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 풍광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로마 유적지와는 달리 스플리트 주민 3000여 명이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 기대어 산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길을 따라 식당, 호텔, 기념품점 등이 200여 곳 된다. 황제가 행사를 열었던 열주광장에서 1700년 된 대리석에 앉아 차를 마실 수 있으니 멋진 시간 여행 명소다. 광장을 중심으로 볼거리가 사통팔달 통해 만남의 장소와 이정표 구실을 한다.
서문 주변은 스플리트의 최대 번화가이자 쇼핑가. 동문을 나서면 싱싱한 해산물과 채소, 과일 좌판대가 늘어선 재래시장이다. 북문 앞엔 높이 4.5m의 종교지도자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이 행인들을 굽어본다. 10세기 때 대주교로 라틴어 예배를 반대하고 크로아티아 모국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투쟁한 인물이다.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왼쪽 엄지발가락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남문 밖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산책코스다. 하얀 대리석이 깔린 일직선 거리 주변엔 노천카페가 즐비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에서 멀지 않은 솔린(살로나)에서 태어난 천민 출신이다.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경호대장으로 활약하다 황제가 암살되자 황제로 추대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은퇴 후 노후를 보낼 궁전을 고향과 가까운 스플리트에 짓는다. 295년부터 10년에 걸친 대역사다.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이탈리아 대리석을 가져다 꾸밀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궁전이 완공 된 305년에 생을 마감하여 이 궁전에서 보내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궁전은 로마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쫓겨난 로마 황제들의 도피처로 사용됐고 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황폐화됐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암살과 권력 다툼의 위기에서 로마를 구한 황제다.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4두 체제를 구축하고 군제, 세제, 화폐제도 등 대대적 개혁으로 제국 통합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황제의 말년과 사후는 비참했다. 아내와 딸은 황제 자리를 내준 다음 황제에 의해 납치됐다가 살해된다.
재위 시절 그리스도교 박해는 멍에가 됐다. 죽은 뒤 170여 년이 지나 그가 묻혔던 영묘의 석관은 파헤쳐진 채 행방이 묘연하다. 영묘가 있던 자리엔 종교 탄압으로 순교한 성 도미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세운 대성당이 들어섰다. 60m 높이의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 종탑에 오르면 스플리트 일대와 주변 섬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천민에서 최고 권좌에 올라 영욕을 누렸으나 권력이란 한 줌 바람처럼 무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