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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마지막 피난처

[한희철 목사님] 마지막 피난처

by 한희철 목사님 2020.08.12

가뭄 끝은 있어도 홍수 끝은 없다는 옛말은 오랜 경험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늘이 허락하시는 것을 누리며 살아온 누대의 세월이 켜켜 쌓여 있겠지요. 살아가면서 지켜보니 가뭄보다 무서운 것이 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가뭄은 이런저런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 막아낼 길이 조금은 있지만, 홍수는 그저 손을 놓고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전부일 때가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즘의 시간이 꼭 그렇습니다. 도대체 비가 처음 내리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를 기억하지 못할 만큼 장기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맑은 하늘을 본 것이 언제인가 싶게 흐린 하늘이 일상처럼 자리를 잡았고, 양을 가늠할 수 없는 비는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집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피해 소식도 여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한순간에 잃기도 하고, 정든 집이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고, 땀 흘려 키운 농작물이 모래와 자갈에 묻히기도 하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물난리가 지나간 모습은 마치 쓰나미가 지나간 것 같은데, 엎친 데 덮친 듯 또다시 들려오는 것은 태풍 소식입니다.
아픔과 혼란이 가득한 시간 속에서도 눈길을 끄는 의외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10여 마리의 소떼가 암자로 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지난 9일 오후 1시쯤 구례 오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조계종 화엄사 말사인 사성암 대웅전 마애약사여래불이 있는 유리광전 앞마당에 난데없이 소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날부터 3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고, 섬진강이 범람하며 구례 서시천 제방이 무너지는 등 일대 곳곳이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 축사에 물이 차오르자 소들이 축사를 빠져나와 암자로 피했다는 것입니다. 사성암이 자리 잡은 곳은 해발 531m 높이, 소들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3㎞가량을 산 쪽으로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소들은 그곳이 사찰 경내인지를 알았는지 조용히 쉬기도 하고 풀을 뜯기고 하면서 얌전히 시간을 보내다가 연락을 받고 찾아온 주인을 따라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소 주인은 잠시 소들을 맡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소떼를 몰고 내려갔다 하고요.
사찰 경내에 소들이 모여 있는 한 장의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사연을 몰랐다면 이게 무슨 광경일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을 드문 사연, 그럴수록 그 장면은 더없이 소중하고 의미 있고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사진을 바라보다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이 땅 곳곳에 자리 잡은 사찰이며 성당이며 교회가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누구라도(소들조차도!) 피할 수 있는 곳, 위험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안전과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는 곳, 누구에게라도 문이 열려져 있는 피난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빗속을 달려 산꼭대기 암자로 피한 소들의 모습은 이 땅 마지막 피난처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엄하게 묻고 있지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