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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매미: 조선 후기 이덕무의 선귤당(蟬橘堂)

[강판권 교수님] 매미: 조선 후기 이덕무의 선귤당(蟬橘堂)

by 강판권 교수님 2020.08.17

매미과의 매미는 우리나라의 여름을 대표하는 곤충이다. 매미에 대한 인문학적인 얘기는 아주 많지만, 나는 매미 소리를 들으면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호 중 하나인 선귤당(蟬橘堂)이 떠오른다. 이덕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호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청장관(靑莊館), 선귤당(蟬橘堂), 형암(炯菴), 단좌헌(端坐軒), 주충어재(注蟲魚齋), 학초목당(學草木堂), 향초원(香草園), 매탕(蕩宕), 아정(雅亭), 사이재거사(四以齋居士), 학상촌부(鶴上村夫), 한죽당(寒竹堂), 이암거사(以菴居士) 등 무려 13개의 호를 가졌다. 그중에서 청장관과 선귤당은 이덕무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다.
청장관은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덕무의 대표적인 호이다. 청장관의 ‘청장’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형암행장(炯菴行狀)』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청장은 왜가리과의 해오라기의 별칭이다. 해오라기는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뒤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것만 쪼아 먹는다. 그래서 해오라기를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부른다. 청장은 이덕무가 지나치게 이익만을 쫓지 않겠다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선귤당의 ‘선귤’은 매미 허물과 귤껍질을 의미한다. 이는 서울 남산에 살았던 이덕무 자신의 집이 작았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선귤당기(蟬橘堂記)』에서 이덕무의 많은 호 탓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것을 걱정했지만, 이덕무는 매미의 허물이 말라붙고 귤껍질이 텅 비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올 리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선귤당기』를 읽으면서 작은 집을 짓고 자신만의 길을 걷겠다는 친구가 혹시나 이름 탓에 그 뜻을 펼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박지원의 깊은 마음을 느꼈다.
이덕무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서얼 출신 탓에 39세 때 이르러서야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기용되었다. 그가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된 것은 박물학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덕무의 능력은 아들과 손자까지 이어졌다. 아들과 손자도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아들 이광규(李光葵, 1765-1817)는 1795년에 아버지의 저술을 모두 모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33책 71권을 펴냈고, 손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학문적으로 할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남겼다.
이덕무와 그의 아들 및 손자는 신분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덕무와 이규경이 남긴 작품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들이 참고한 중국 자료를 보면 중국사 전공자인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특히 나는 두 사람의 작품 중에서도 식물 관련 정보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언젠가 두 사람을 비롯해서 실학자들의 식물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나라 식물학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간혹 나무 관련 작품을 저술하면서 이덕무가 더운 여름날 선귤당에 앉아서 저술에 몰두한 장면을 떠올린다. 아마도 이덕무는 선귤당에서 저술할 때가 가장 행복했을지 모른다. 그 순간 모든 번뇌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어떤 더위도 이길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