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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멋을 아는 동네 새들

[권영상 작가님] 멋을 아는 동네 새들

by 권영상 작가님 2020.08.20

가끔 뜰 마당에 박새가 놀러 온다. 내가 혼자 안성에 내려와 우두커니 사는 사정을 박새가 모를 리 없다. 오늘도 동무 삼아 나를 찾아와 내가 사는 뜰을 노크한다.
쪼빗쪼빗쪼빗!
나는 가만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꽃이 한창 피는 뜰 앞 배롱나무 가지에 와 앉았다. 집안을 향해 나를 부르듯 노래한다. 언제 들어도 목청이 또랑또랑하다. 첫눈 내릴 무렵이라든가 가을비 내릴 무렵에 듣는 목소리는 왠지 내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박새 목소리엔 묘한 감정이 스며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목소리가 무르익어 멋을 부린다. 목청 끝을 길게 끌어올린다거나 똑똑 끊는 멋을 낸다. 뜰을 환하게 밝히는 배롱나무 고운 꽃 탓이겠다.
목청도 그렇지만 의복 또한 반듯하다. 쓰고 온 모자도 반듯하거니와 의상이 맵시 있다. 봄 의상이 흰색과 재회색의 경계가 좀 모호하다면 여름 의상은 그 경계가 더욱 또렷하다. 누가 밀양 박씨 아니랄까 봐 여름이 깊어가듯 목소리며 의관이 예스럽다.
마당귀에 뜰보리수가 한창 익을 때다.
누군가 데크 난간에 잘 익은 보리수 열매 두어 개를 얹어놓고 가곤 했다. 홍보석처럼 빨갛게 빛나는 보리수 열매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인적이라곤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가끔 찾아오는 박새나 곤줄박이 짓이었다. 저희들만 먹고 가는 게 미안했던지 나를 위해 열매 몇 알쯤 물어다 놓고 갈 줄 안다. 마음씨도 예쁘지만 난간에 홍보석 몇 알 올려놓는 그 멋을 부리는 안목이 놀랍다. 내가 가끔 수돗가에 상추잎을 씻으러 가는 걸 아는 녀석들인지라 수돗가 시멘트 난간에도 가끔 보리수 한 놈쯤 오도카니 놓아두고 간다.
이 근방의 새들은 정말 남다르다. 달콤한 열매를 배불리 따먹고 그냥 가버리면 그만인 것을, 내 몫을 굳이 챙겨주고 간다. 놓는 자리도 데크 바닥에 툭 떨어뜨리고 갈 만도 한데 꼭 난간에 예쁘고 얹어두고 간다. 나는 빨강 뜰보리수와 진한 고동색 난간, 수돗가 물그릇 속의 하양 물과 빨강 보리수의 대비를 새들처럼 요모조모 즐기곤 했다.
한때 곤줄박이는 창밖 우편 물통을 기웃거리다가 거기를 제 둥지로 삼았다. 빨간 우체통을 제 아이들의 고향으로 만들어주려는 곤줄박이의 욕심은 맑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때 곤줄박이는 연둣빛 봄 사랑을 나눈 후 한 달가량을 머물며 알을 낳아 새끼를 쳐서는 날아갔다.
그러던 것이 요 얼마 전이다.
길 건너 고추밭의 해바라기 한 줄기가 무럭무럭 크더니 노란 꽃을 피웠다. 넓은 고추밭 한가운데에 어쩐 일로 해바라기가, 그것도 한 줄기가 서 있게 된 걸까, 그게 궁금했다. 고추농사를 짓는 둥개 아저씨가 그랬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 새들의 짓이 분명하다. 지난해 우리 집이거나 뉘 집 뜰에 서 있던 해바라기에서 씨앗 하나 빼어 물고 가다가 일부러 그쯤에 똑 떨어뜨렸을 것이다. 새는 지루하고 널따란 고추밭에 해바라기 한 그루쯤 세우고 싶었겠다.
어쩌면 섬 같은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을 테다. 그게 해바라기였겠다. 새들은 거기 잠깐씩 들러 한낮의 고독을 맛본다든가, 그걸 이겨내려고 노래 한 소절을 부르거나, 낮달 한번 쳐다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겠다.
다락방에 올라가 고추밭에 핀 노란 해바라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새 한 마리가 거기 오도카니 앉아 조빗조빗 울다 날아간다. 사람과 섞여 사느라 텃새들이 미학을 알고 멋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