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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호랑이 살던 그 고갯길

[권영상 작가님] 호랑이 살던 그 고갯길

by 권영상 작가님 2020.09.17

아랫말 우출댁 넷째 집, 그게 남들이 부르는 우리 집 택호다. 우출이란 지금의 위촌리에서 출가해 오신 할머니의 고향이며 그 할머니의 넷째 아들이 아버지다. 그러니 자연 택호가 넷째 집이다. 택호를 말하려는 게 아니고 아랫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거다. 아랫말로 들어오려면 자연히 윗마을을 통과해야 한다.
타지역에서 윗마을로 들어오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했다. 고개 이름이 어이넘어고개다. 이름만 보아도 고개를 넘나든 이들의 고단함이 묻어있다. 아, 어이 넘을꼬. 숨을 몰아쉬며 허덕거리지 않고는 넘을 수 없는 고개가 그 고개다. 그 고개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도 읍내 학교를 다닐 때 그 고개를 넘었다.
그러던 것이 내 나이가 쪼끔 들 무렵이다. 호수로 빙 둘러싸인 아랫말에 건실한 다리가 놓였다. 호수 건너편이 관광지가 되면서 아랫말 사람들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바뀌었다. 그런 관계로 나중에 어른이 되어 고향을 찾을 때도 당연히 그 다리를 타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차츰 어이넘어고개는 아랫말 사람들과 멀어졌다.
근데 지난 화요일이다.
고향에 볼일이 있어 차를 몰아 내려갈 때다. 문득 그 어이넘어고개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그 고개를 넘나들었으니 왜 생각나지 않겠는가. 나는 그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거기엔 내가 찾던 어이넘어고개는 없었다. 그 어름에 차를 세우고 지나는 분에게 물었다. 지금 딛고 있는 이 평평한 포장길이 그 고개라는 것이다.
나는 소로를 타고 깎여나가고 남은 산길을 걸어 올랐다. 산은 그 산일 텐데 언덕만 하다. 예전 이 어디쯤에 오르면 넓은 하평이 발아래에 내려 다 보일 만큼 고개가 높았다. 그 어이넘어고개에 호랑이가 살았다. 어린 우리들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가끔 담배 피며 놀고 있을 호랑이를 보러 그 산을 찾았다. 연실 서로에게 쉿! 쉿!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해 보이며 살금살금. 거기엔 호랑이가 사는 집이 있었다. 커다란 바위 아래 구덩이가 그의 집이었다. 운도 억시 게 나빴다. 갈 때마다 똥 누러 갔는지 호랑이는 없고, 호랑이 발자국만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어이넘어고개를 넘어 읍내 장에 갔다. 장이란 원래 해가 다 지도록 늦게 파하는 법이다. 장에 가신 어머니를 바래러 나는 아랫말에서 이 먼데까지 걸어왔다. 밤이면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는 긴 꼬랑지로 사람의 목덜미를 휙 때리거나 돌멩이를 집어던진다고 했다. 윗마을 누군가는 그 호랑이 꼬랑지에 탁 맞아 그만 숨을 거두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넘어오는 처녀귀신과 눈이 맞어 그와 사흘을 살다가 멀고 먼 세상으로 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마을에 힘깨나 쓰며 꺼덕거리던 주먹이 있었는데 멀쩡한 그가 사흘 만에 죽자, 그 이야기가 돌았다. 그가 그라고.
그런 으스스 한 어이넘어고개를 어머니가 홀로 오신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울며 울며 오지 않는 어머니를 불렀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울음 섞인 내 목소리를 먼 데서 듣고, 황급히 고개를 향해 달려오셨다.
나라에 전쟁이 나면 마을 청년들은 이 고개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갔고, 이 고개를 넘어 살아서 돌아왔다. 그런데 그 고개가 없어졌다. 차를 몰아 고향으로 들어서지만 고향이 고향 같지 않다. 그 옛날의 집들도, 나를 알던 이들도 다 떠나고 없다. 고향은 고향인데 어이넘어고개도 없고, 부모님마저 멀리 떠나가신 허전한 타인의 고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