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이미지

오피니언

오피니언

[강판권 교수님] 미꾸라지와 추억

[강판권 교수님] 미꾸라지와 추억

by 강판권 교수님 2020.09.21

미꾸리과의 미꾸라지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추어탕의 재료다. 미꾸라지는 주로 풀이 있는 도랑에 산다. 농촌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추억을 갖고 있다. 특히 비가 오면 아이들이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 동네 어귀 도랑에 모였다. 도랑에 빗물이 흐르면 미꾸라지들이 그곳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다 보면 간혹 물뱀을 민물장어인 줄 알고 주전자에 넣곤 했다. 그러면 한참 정신없이 미꾸라지를 잡고 한숨 돌린다고 주전자를 보면 물뱀만 남고 미꾸라지는 한 마리도 없다. 어린 시절 가장 난감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농촌의 도랑은 대부분 콘크리트로 바뀌어 미꾸라지가 살 공간이 없을 뿐 아니라 농약 살포로 미꾸라지가 살아남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식당에서 먹는 추어탕은 대부분 양식한 미꾸라지다.
나는 젊은 시절 가을 벼 추수 때 논에 물을 빼기 위해 가장자리에 만든 작은 도랑에서 만난 배 부위가 누런 미꾸라지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시냇물을 흐리게 한다”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은 좋아하면서도 좋지 않은 이미지를 표현할 때 미꾸라지를 이용했다.
중국에서도 북송의 소식이 구양순의 제문(祭文)에서 “산과 못에 용과 호랑이가 떠나고 나면 온갖 변괴가 나타나서 미꾸라지며 여우 따위가 판을 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처럼, 미꾸라지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았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에서 미꾸라지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본 것은 몸놀림이 아주 빠른 미꾸라지의 행동이 주변을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연산 미꾸라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생태 차원에서 보면 아주 심각한 일이다. 미꾸라지가 살았던 공간은 건강한 자연생태였다. 이제 농촌에서 미꾸라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생태계가 위험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기 위해 미꾸라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미꾸라지가 사라지면 자신도 건강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무지다. 무지몽매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시냇물을 흐리게 한다”라는 속담은 단순히 미꾸라지의 행동만 보고 평가한 것이지만, 미꾸라지가 살고 있는 공간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면 결코 미꾸라지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추억은 지난날을 떠올리는 필터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수단이어야 가치 있다. 추억이 요즘의 유행어 ‘라떼는 말이야’로 전락하면 곤란하다. 한 개인의 추억은 언제나 소중하지만,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추억의 가치는 단순히 소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생산하는 데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추억을 소비할 뿐이다. 고향 친구나 학교 동창을 만나면 추억을 소비하다 헤어진다. 더욱이 각 개인의 추억은 요즘 시대와 잘 맞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추억을 소비하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국민이 추억을 생산적인 가치로 전환할 수 있다면 엄청난 경제 효과를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