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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종로통에 가부좌 튼 전봉준

[이규섭 시인님] 종로통에 가부좌 튼 전봉준

by 이규섭 시인님 2022.04.22

종로통에 나가면 전봉준과 만난다. 종각 네거리 영풍문고 앞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민 상투에 동저고리 차림으로 오가는 길손을 지켜본다. 약간 오른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허공을 가르는 눈빛이 형형하다. 두 손은 바닥을 짚고 있어 불의 앞에 금방이라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설 것만 같다.
전봉준은 구한말 탐관오리들의 적폐를 뒤엎고 백성이 사람대접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선봉에 섰다. 1894년 3월 고부(古阜)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기 위해 봉기한 농민군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1만여 명의 군사가 집결했다. 농민군과 관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대치를 벌였다. 4월 6일 밤 농민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 대부분 관군이 전사하고 농민군은 한 달 만에 호남지역을 석권한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기세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농민군들은 전국 곳곳에 농민 자치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해 개혁운동을 폈다. 그해 9월 2차 봉기에 나섰다가 전북 순창에서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됐고 1895년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된 뒤 처형당했다. 동상이 세워진 자리가 전옥서 터다.
전봉준은 교수형을 당하기 전 “너희는 나를 죽일진 데,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옳은 일이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暗然)히 죽이느냐”고 했다. 그로부터 123년이 지난 2018년 4월 24일 동상으로 환생하여 종로 네거리에 앉게 됐다. 동상 제막식 땐 구금돼 있던 전봉준이 재판을 받기 위해 들것에 실려 나서는 상황을 재현했다. 1895년 2월 28일 당시 일본인이 촬영한 전봉준의 사진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모습이다. 그 사진을 모델 삼아 충북대 명예교수인 조각가 김수현(金水鉉) 씨가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전봉준 동상은 두 곳에 더 있다. 전주 덕진공원의 ‘전봉준 선생상’(배형식 작)과 정읍 황토현 전적지기념관에 서 있는 동상(김경승 작)이다. 황토현 전적지와 전봉준의 생가는 취재차 들렸던 곳이다. 황토현의 동상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오른손을 치켜든 농민봉기와 투쟁을 표현했지만 선비 같다거나 민 상투에 두루마기 차림이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동상 뒤 부조는 관군과 싸우려 나가는 농민군이 마치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묘사됐다는 비판도 들었다.
유적 복원은 사실(史實)에 충실해야 하는데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전봉준 생가터 옛집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옆집을 헐어 정원을 만들고 부잣집에서나 썼을 뒤주를 부엌에 놓았다. 논 세 마지기를 지으며 서당 훈장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당시의 살림살이와 어울리지 않는다.
전봉준이 일으킨 대규모 농민봉기를 처음엔 ‘동학란’이라 불렀다. 이후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 1894농민전쟁, 갑오농민혁명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었다. 2004년 그동안 ‘난(亂)’에 갇혀 있던 동학의 공식 명칭을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 하기까지 110년이 걸렸다. 역사 바로잡기가 어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