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태화강의 늦가을 십리대숲길
[권영상 작가님] 태화강의 늦가을 십리대숲길
by 권영상 작가님 2018.11.29
오형, 잘 올라왔습니다. 집에 오니 자정이 가깝네요. 십리대숲길 만회정 앞에서 악수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지요. 형은 울산인 댁으로 가시고, 저는 울산역을 향했지요. 그때는 일몰이 막 시작되는 때였고, 택시 안에서 뜻밖의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떼까마귀 군무였습니다. 빨간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춤추는 그들 모습이 괴이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지만 그것이 삼호대숲에 하룻밤 잠을 청하는 잠값이려니 하고 보니 멋지기도 했습니다.
오형 덕분에 태화강 십리대밭길 잘 걸었습니다. 울산 내려가면 다른 데는 몰라도 거기 대숲에 한번 들어가 보리라 했는데, 그 원을 풀었네요. 보기와 달리 숲안의 바람은 한적했고, 푸르렀고, 잠든 감각을 일깨우기도 했어요. 대숲 향 때문이겠지요. 머리가 예민해졌어요. 그 길을 걸으며 오형은 서덕출 선생의 ‘봄편지’를 읊었지요.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배경음악인 양 대숲 소소소 바람소리가 박형의 목소리를 받쳐주었고, 상기된 박형의 얼굴은 소년 같이 앳되어 보였습니다.
서덕출 선생은 1907년, 울산에서 태어나셨다고 했지요. 다섯 살 무렵에 대청마루에서 떨어져 불구의 몸이 되었고, 학교 대신 집에서 어머니가 가르쳐주시는 한글 공부로 글을 배웠다지요. 1925년, 18살 무렵 봄편지 동요를 발표하면서 글을 썼고, 홀로 공부하여 애생당이라는 신약방을 운영하였지만 끝내 34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지요. 지금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90여 년 전만 해도 불구의 몸을 가진 분들이 겪어냈어야 할 조롱하고, 멸시와 설움은 또 얼마나 크고 힘겨웠을까요.
이 태화강가 어느 마을에 사셨다는 선생은 그럴 때면 강가 버드나무 밑에 나와 성하지 않은 몸의 회복을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라고 노래하셨겠지요. 추위와 바람을 맞으며 사는 이들에게, 나라 잃은 그 무렵 사람들에게 봄은 위안이며 한 가닥 희망이며 염원이며 살아갈 이유이기도 했겠지요.
인기척이 별로 없는 늦은 오후의 대숲길은 오형과 둘이 걷기에 그만이었습니다. 숲에선 대나무 솎아내는 작업도 했는데 대나무를 벨 때마다 풍겨나오던 죽향 때문에 우리는 몇 번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코를 벌름거렸지요. 대나무밥집 대통밥에서 느끼던 그 향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픔직한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숲길을 나와 1600년 무렵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만회정에 잠시 앉았습니다. 거기 앉아 태화강을 바라보았습니다. 강물은 여름날의 격정과 욕망을 다 버리고 유유히 흘렀고, 그 위로 낙조가 번뜩였습니다. 옛분들도 여기에 앉아 저 가을물처럼 맑을 대로 맑아지기를 바라며 자신을 온전히 살리곤 했겠지요.
예매해 놓은 기차시간만 아니었어도 오형이 말한 십리대숲 ‘은하수 밤길’을 걷고, 또 따뜻한 저녁밥도 먹었겠지요. 그러지 못한 채 손을 놓고 돌아서는 마음이 아쉬웠습니다. 2시간여 만에 무사히 서울역에 도착했고, 집에도 잘 돌아왔습니다.
오형과 함께 걷던 굽이굽이 십리대숲길이 또렷이 눈에 어리네요. 태화강 어느 어름 어디에 사셨다는 그 옛날의 동요시인 서덕출도 오늘 하루 조용히 숲길을 걸으며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요. 건강하시고, 좋은 시 쓰시길 바랍니다.
오형 덕분에 태화강 십리대밭길 잘 걸었습니다. 울산 내려가면 다른 데는 몰라도 거기 대숲에 한번 들어가 보리라 했는데, 그 원을 풀었네요. 보기와 달리 숲안의 바람은 한적했고, 푸르렀고, 잠든 감각을 일깨우기도 했어요. 대숲 향 때문이겠지요. 머리가 예민해졌어요. 그 길을 걸으며 오형은 서덕출 선생의 ‘봄편지’를 읊었지요.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배경음악인 양 대숲 소소소 바람소리가 박형의 목소리를 받쳐주었고, 상기된 박형의 얼굴은 소년 같이 앳되어 보였습니다.
서덕출 선생은 1907년, 울산에서 태어나셨다고 했지요. 다섯 살 무렵에 대청마루에서 떨어져 불구의 몸이 되었고, 학교 대신 집에서 어머니가 가르쳐주시는 한글 공부로 글을 배웠다지요. 1925년, 18살 무렵 봄편지 동요를 발표하면서 글을 썼고, 홀로 공부하여 애생당이라는 신약방을 운영하였지만 끝내 34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지요. 지금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90여 년 전만 해도 불구의 몸을 가진 분들이 겪어냈어야 할 조롱하고, 멸시와 설움은 또 얼마나 크고 힘겨웠을까요.
이 태화강가 어느 마을에 사셨다는 선생은 그럴 때면 강가 버드나무 밑에 나와 성하지 않은 몸의 회복을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라고 노래하셨겠지요. 추위와 바람을 맞으며 사는 이들에게, 나라 잃은 그 무렵 사람들에게 봄은 위안이며 한 가닥 희망이며 염원이며 살아갈 이유이기도 했겠지요.
인기척이 별로 없는 늦은 오후의 대숲길은 오형과 둘이 걷기에 그만이었습니다. 숲에선 대나무 솎아내는 작업도 했는데 대나무를 벨 때마다 풍겨나오던 죽향 때문에 우리는 몇 번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코를 벌름거렸지요. 대나무밥집 대통밥에서 느끼던 그 향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픔직한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숲길을 나와 1600년 무렵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만회정에 잠시 앉았습니다. 거기 앉아 태화강을 바라보았습니다. 강물은 여름날의 격정과 욕망을 다 버리고 유유히 흘렀고, 그 위로 낙조가 번뜩였습니다. 옛분들도 여기에 앉아 저 가을물처럼 맑을 대로 맑아지기를 바라며 자신을 온전히 살리곤 했겠지요.
예매해 놓은 기차시간만 아니었어도 오형이 말한 십리대숲 ‘은하수 밤길’을 걷고, 또 따뜻한 저녁밥도 먹었겠지요. 그러지 못한 채 손을 놓고 돌아서는 마음이 아쉬웠습니다. 2시간여 만에 무사히 서울역에 도착했고, 집에도 잘 돌아왔습니다.
오형과 함께 걷던 굽이굽이 십리대숲길이 또렷이 눈에 어리네요. 태화강 어느 어름 어디에 사셨다는 그 옛날의 동요시인 서덕출도 오늘 하루 조용히 숲길을 걸으며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요. 건강하시고, 좋은 시 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