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목사님]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한희철 목사님]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by 한희철 목사님 2018.12.12
사랑만큼 많이 언급된 시와 노래의 주제가 또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시대와 나라를 떠나 사랑만큼 많은 이들에게 불리고 언급되는 노래와 시는 따로 없겠다 싶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든, 눈물겨운 슬픈 사랑이든, 사랑으로 인한 이별이든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관심사인 것이지요.
사랑에 대한 수많은 시 중에서도 절창이라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김남조 시인의 『사랑초서』입니다. 젊은 시절 『사랑초서』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 짤막한 시 백두 편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문득 먼 산을 멍하니 보듯 마음이 아뜩해지곤 했습니다. 서둘러 다음 장을 넘기는 대신 한참 동안 마음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뼛속까지 시린 추운 겨울, 버릴 걸 모두 버리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남은 겨울나무처럼, 사랑에 대한 온갖 군더더기 감정들을 버리고 사랑의 뼈대로만 남았지 싶었습니다.
『사랑초서』 중에서도 15번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소름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
시를 음미하면 마치 영혼의 오솔길을 홀로 걷는 것처럼 생각이 이어집니다. 누군가가 내 사랑하는 이를 부릅니다. 부르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관한 것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이야 누구라도 들을 수 있지만, 영혼을 부르는 것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이만이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들은 것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 그런데도 내가 대답을 합니다. 나도 모르게 하는 대답입니다. 그랬던 것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가 내 영혼을 부르는 소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를 부르는 것은 곧 나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랑으로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너와 내가 자리 잡은 영혼의 지평엔 더 이상 어떤 벽도 낯섦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를 불렀는데 내가 대답을 하다니, 바로 그 순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으로, 영혼으로 전율을 느끼는 것은 대답하는 행위 때문만이 아닙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그렇게 둘의 영혼이 하나라는 것을 떨림으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맹’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무겁고 음습한 느낌도 얼마든지 환하고 아름답게 달라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렘이나 떨림 없이 부르고 대답하는 이름과 이름들, 갈수록 우리들의 만남은 가벼워지고 관계는 형식적이 되어 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떨림으로 부르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게 되는, 대답을 하며 그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관계를 되찾는 것에 우리 삶의 회복이 달려 있다 싶습니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시 중에서도 절창이라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김남조 시인의 『사랑초서』입니다. 젊은 시절 『사랑초서』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 짤막한 시 백두 편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문득 먼 산을 멍하니 보듯 마음이 아뜩해지곤 했습니다. 서둘러 다음 장을 넘기는 대신 한참 동안 마음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뼛속까지 시린 추운 겨울, 버릴 걸 모두 버리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남은 겨울나무처럼, 사랑에 대한 온갖 군더더기 감정들을 버리고 사랑의 뼈대로만 남았지 싶었습니다.
『사랑초서』 중에서도 15번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소름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
시를 음미하면 마치 영혼의 오솔길을 홀로 걷는 것처럼 생각이 이어집니다. 누군가가 내 사랑하는 이를 부릅니다. 부르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관한 것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이야 누구라도 들을 수 있지만, 영혼을 부르는 것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이만이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들은 것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 그런데도 내가 대답을 합니다. 나도 모르게 하는 대답입니다. 그랬던 것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가 내 영혼을 부르는 소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를 부르는 것은 곧 나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랑으로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너와 내가 자리 잡은 영혼의 지평엔 더 이상 어떤 벽도 낯섦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를 불렀는데 내가 대답을 하다니, 바로 그 순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으로, 영혼으로 전율을 느끼는 것은 대답하는 행위 때문만이 아닙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그렇게 둘의 영혼이 하나라는 것을 떨림으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맹’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무겁고 음습한 느낌도 얼마든지 환하고 아름답게 달라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렘이나 떨림 없이 부르고 대답하는 이름과 이름들, 갈수록 우리들의 만남은 가벼워지고 관계는 형식적이 되어 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떨림으로 부르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게 되는, 대답을 하며 그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관계를 되찾는 것에 우리 삶의 회복이 달려 있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