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누가 뭐래든 당신이 옳다
[김재은 대표님] 누가 뭐래든 당신이 옳다
by 김재은 대표님 2018.12.13
한 해가 저물어간다.
정말 잘 살아온 한 해였는지 자신은 못하지만 큰 탈 없이 터벅터벅 뚜벅뚜벅 걸어왔으니 이만하면 잘 살아왔지 싶다.
거울을 본다. 그 안에 활짝 웃고 있는 한 사내가 있다.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묻고 싶지만 웃는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내 인생에서 다시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새날이 올 것이다. 한 해 한 해가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그런 삶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그러기에 내가 어떤 한 해, 아니 어떤 하루를 보냈느냐가 나아가 세상의 모습이 되고 그 세상은 그대로 나에게 녹아든다.
언제 세상이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만은 요즘 유난히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그동안 불평과 불만, 불안, 3不 속에 살아온 삶의 타성의 늪에 먹구름이 드리운 형국이다.
그 중심에 ‘난 왜 이럴까, 왜 나만 힘들까’가 있다. 나로서 살기보다는 세상 속에 비쳐진 존재로 살거나 근거도 없는 몇몇 기준이나 획일적 가치에 나의 삶을 억지로 들이밀다 보니 난 늘 힘이 든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를 입고, 쉽게 짜증이 나고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게 되는 것은 덤이다. 난 언제나 ‘틀린 존재’라는 단순한 인식을 넘어 확신에 이르는 중증 환자가 된다. 만성적인 ‘나’ 기근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진짜 내 편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이내 우울해지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나마 내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별것 아닌 걸로 그런다’면서 버티라고 말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지금 죽어가고 있더라도 내 손톱 밑의 작은 가시가 더 고통스러운게 우리네 일상의 삶의 모습이다. 누가 뭐라 하든 내가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린 수많은 삶들이 끝내 ‘죽음’으로 하소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과거에는 삶이든 인간관계든 몇 가지 기준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가치와 인간관계 등에서 훨씬 복잡해진 세상을 살다 보니 ‘옳고 그름’에 ‘좋고 싫음’까지 뒤엉켜 ‘나다움’과 ‘나의 존재의식’은 갈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쉽게 내리는 결론이 ‘나는 왜 이럴까’이고 나는 ‘틀린 존재’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느라 바쁜 시대에 ‘나’를 주목해 줄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정받고 싶고, 그것 때문에 힘이 날 것 같은데 외톨이 느낌은 나를 낭떠러지로 몰고 간다.
바로 이때 스스로에게 해 주는 선물이 ‘내가 옳다’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해 주는 형식이라면 ‘당신이 옳다’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이 있고 사연이 있으며 ‘그런 저런’ 이유가 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다. 분석적인 접근의 객관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에서는 그 무엇도 옳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이유가 있기에 ‘옳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 사람’이 살아갈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는 인식과 자각은 그대로 ‘당신도 옳다’는 것으로 옮겨간다. ‘옳음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옳고 누군가도 옳으니 거기서 관대함이 일어나고 이해와 배려, 나아가 사랑이 꽃핀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올 한 해 수고하셨음을 알기에 선물처럼 드리고 싶다. ‘당신이 옳다’
정말 잘 살아온 한 해였는지 자신은 못하지만 큰 탈 없이 터벅터벅 뚜벅뚜벅 걸어왔으니 이만하면 잘 살아왔지 싶다.
거울을 본다. 그 안에 활짝 웃고 있는 한 사내가 있다.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묻고 싶지만 웃는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내 인생에서 다시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새날이 올 것이다. 한 해 한 해가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그런 삶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그러기에 내가 어떤 한 해, 아니 어떤 하루를 보냈느냐가 나아가 세상의 모습이 되고 그 세상은 그대로 나에게 녹아든다.
언제 세상이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만은 요즘 유난히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그동안 불평과 불만, 불안, 3不 속에 살아온 삶의 타성의 늪에 먹구름이 드리운 형국이다.
그 중심에 ‘난 왜 이럴까, 왜 나만 힘들까’가 있다. 나로서 살기보다는 세상 속에 비쳐진 존재로 살거나 근거도 없는 몇몇 기준이나 획일적 가치에 나의 삶을 억지로 들이밀다 보니 난 늘 힘이 든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를 입고, 쉽게 짜증이 나고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게 되는 것은 덤이다. 난 언제나 ‘틀린 존재’라는 단순한 인식을 넘어 확신에 이르는 중증 환자가 된다. 만성적인 ‘나’ 기근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진짜 내 편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이내 우울해지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나마 내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별것 아닌 걸로 그런다’면서 버티라고 말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지금 죽어가고 있더라도 내 손톱 밑의 작은 가시가 더 고통스러운게 우리네 일상의 삶의 모습이다. 누가 뭐라 하든 내가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린 수많은 삶들이 끝내 ‘죽음’으로 하소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과거에는 삶이든 인간관계든 몇 가지 기준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가치와 인간관계 등에서 훨씬 복잡해진 세상을 살다 보니 ‘옳고 그름’에 ‘좋고 싫음’까지 뒤엉켜 ‘나다움’과 ‘나의 존재의식’은 갈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쉽게 내리는 결론이 ‘나는 왜 이럴까’이고 나는 ‘틀린 존재’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느라 바쁜 시대에 ‘나’를 주목해 줄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정받고 싶고, 그것 때문에 힘이 날 것 같은데 외톨이 느낌은 나를 낭떠러지로 몰고 간다.
바로 이때 스스로에게 해 주는 선물이 ‘내가 옳다’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해 주는 형식이라면 ‘당신이 옳다’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이 있고 사연이 있으며 ‘그런 저런’ 이유가 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다. 분석적인 접근의 객관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에서는 그 무엇도 옳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이유가 있기에 ‘옳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 사람’이 살아갈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는 인식과 자각은 그대로 ‘당신도 옳다’는 것으로 옮겨간다. ‘옳음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옳고 누군가도 옳으니 거기서 관대함이 일어나고 이해와 배려, 나아가 사랑이 꽃핀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올 한 해 수고하셨음을 알기에 선물처럼 드리고 싶다. ‘당신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