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지금 감기 중입니다
[권영상 작가님] 지금 감기 중입니다
by 권영상 작가님 2019.01.17
어릴 때는 외부 기온에 예민하지요. 문을 열고 나서다가도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봄을 느끼면 입은 웃옷이 무거워 웃옷을 벗고 가만히 나서지요. 부엌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는 그런 걸 어찌 아셨을까요.
“감기 걸릴라. 옷 입고 가거라.”
어머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 나가지요. 눈 속에서 보리가 파랗게 크는 들판을, 마치 무지개를 찾아다니는 아이처럼 쏘다니곤 했지요. 그러고 집에 돌아온 날 저녁엔 영락없이 감기로 누워 끙끙 앓지요. 봄기운 속에 숨은 소르르한 찬바람을 몰라보고 한방 먹은 거지요. 어렸으니까 들뜬 마음에 철모르고 그랬던 거지요.
나이를 이만큼 먹었다고 좀 달라졌을까요.
해가 바뀌었으니까, 하는 핑계로 제주로 갔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직장일로 해마다 제주를 오갔는데, 직장도 그만두고 나니 거기가 궁금했습니다. 그쪽의 푸른 대양을 향해난 바다와 야자수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눈 덮인 한라산이 정말이지 좀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다기 보다 좀 그립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한라산이 그리운 게 아니라 제주를 해마다 오가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서, 라는 말이 옳겠습니다.
큰엉 해안이 가까운 서귀포 남원에 숙소를 얻었습니다. 저녁 무렵 숙소에 들어 창을 열자 청록색으로 펼쳐진 끝없는 바다가 달빛과 함께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이게 제주구나! 나는 비로소 제주에 온 것을 실감했지요. 제주, 그게 남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한 부분인데도 우리들 마음의 제주는 그게 아닙니다. 제주는 우리들 마음의 섬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늘 그리워하는, 가 닿을 수 없이 머나먼,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피신처거나 스스로를 외로움에 가두어보고 싶은, 몇 번이고 와도 또 그리운 섬입니다.
아침 일찍 큰엉길 걷기에 나섰지요. 간밤의 바람 불 때와 달리 조용하여 덥기까지 합니다. 걷는데 불편할까봐 목도리를 벗었지요. 점퍼 속에 입고 다니던 조끼도 벗었습니다.
“제주 바람, 우습게 보면 안 돼요.”
내가 이것저것 벗어던지는 걸 보고 아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큰엉이란 높은 언덕이나 벼랑을 뜻하는 제주 말인데 큰엉길이란 깎아지른 절벽위에 난 오솔길입니다. 길 양편은 보리장나무 섬쥐똥나무 담팔수, 사철나무 등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지만 그 울타리를 조금만 헤치고 내다보면 코앞이 바다로 떨어지는 큰엉입니다.
그 길을 걷다 보니 걷는 길이 아까워졌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편하게 숨을 들이쉽니다. 바다가 저렇게 넓고 반짝일 수가 없습니다. 눈이 부십니다. 바람 한 자락이 바다를 미끄러져 오네요. 섬쥐똥나무 잎만큼 쪼꼼한 바람이 날아와 떨어지는 곳에 해국이 피고, 감국이 노랗게 피고, 남은 것이 옷깃 안으로 소르르 숨어드네요.
호두암까지 걷고 돌아왔는데 그 길이 올레 5길입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가끔 술래잡기 하듯 댓숲길이 나오고, 동백꽃길이 나오고, 털 머위 노란 꽃이 웃어주는 예쁜 꽃길입니다.
그렇게 걸은 것뿐인데 그 밤부터 콧물이 흐르고,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잘난 척 하더니.”
아내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 후,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때에 얻은 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철없이 바람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은 나이 먹어도 달라지지 않나 봅니다.
“감기 걸릴라. 옷 입고 가거라.”
어머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 나가지요. 눈 속에서 보리가 파랗게 크는 들판을, 마치 무지개를 찾아다니는 아이처럼 쏘다니곤 했지요. 그러고 집에 돌아온 날 저녁엔 영락없이 감기로 누워 끙끙 앓지요. 봄기운 속에 숨은 소르르한 찬바람을 몰라보고 한방 먹은 거지요. 어렸으니까 들뜬 마음에 철모르고 그랬던 거지요.
나이를 이만큼 먹었다고 좀 달라졌을까요.
해가 바뀌었으니까, 하는 핑계로 제주로 갔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직장일로 해마다 제주를 오갔는데, 직장도 그만두고 나니 거기가 궁금했습니다. 그쪽의 푸른 대양을 향해난 바다와 야자수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눈 덮인 한라산이 정말이지 좀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다기 보다 좀 그립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한라산이 그리운 게 아니라 제주를 해마다 오가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서, 라는 말이 옳겠습니다.
큰엉 해안이 가까운 서귀포 남원에 숙소를 얻었습니다. 저녁 무렵 숙소에 들어 창을 열자 청록색으로 펼쳐진 끝없는 바다가 달빛과 함께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이게 제주구나! 나는 비로소 제주에 온 것을 실감했지요. 제주, 그게 남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한 부분인데도 우리들 마음의 제주는 그게 아닙니다. 제주는 우리들 마음의 섬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늘 그리워하는, 가 닿을 수 없이 머나먼,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피신처거나 스스로를 외로움에 가두어보고 싶은, 몇 번이고 와도 또 그리운 섬입니다.
아침 일찍 큰엉길 걷기에 나섰지요. 간밤의 바람 불 때와 달리 조용하여 덥기까지 합니다. 걷는데 불편할까봐 목도리를 벗었지요. 점퍼 속에 입고 다니던 조끼도 벗었습니다.
“제주 바람, 우습게 보면 안 돼요.”
내가 이것저것 벗어던지는 걸 보고 아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큰엉이란 높은 언덕이나 벼랑을 뜻하는 제주 말인데 큰엉길이란 깎아지른 절벽위에 난 오솔길입니다. 길 양편은 보리장나무 섬쥐똥나무 담팔수, 사철나무 등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지만 그 울타리를 조금만 헤치고 내다보면 코앞이 바다로 떨어지는 큰엉입니다.
그 길을 걷다 보니 걷는 길이 아까워졌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편하게 숨을 들이쉽니다. 바다가 저렇게 넓고 반짝일 수가 없습니다. 눈이 부십니다. 바람 한 자락이 바다를 미끄러져 오네요. 섬쥐똥나무 잎만큼 쪼꼼한 바람이 날아와 떨어지는 곳에 해국이 피고, 감국이 노랗게 피고, 남은 것이 옷깃 안으로 소르르 숨어드네요.
호두암까지 걷고 돌아왔는데 그 길이 올레 5길입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가끔 술래잡기 하듯 댓숲길이 나오고, 동백꽃길이 나오고, 털 머위 노란 꽃이 웃어주는 예쁜 꽃길입니다.
그렇게 걸은 것뿐인데 그 밤부터 콧물이 흐르고,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잘난 척 하더니.”
아내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 후,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때에 얻은 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철없이 바람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은 나이 먹어도 달라지지 않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