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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설 명절의 전통적 가치

[이규섭 시인님] 설 명절의 전통적 가치

by 이규섭 시인님 2019.02.01

어린 시절, 설은 설렘이었다, 설빔을 입고 색다른 음식에 세뱃돈까지 챙길 수 있는 기다림이다. 새 옷에서 솔솔 풍기던 나프탈렌 냄새는 신선했다. 말랑말랑한 떡가래를 뚝 떼어 조청에 찍어 먹으면 달고 쫄깃한 맛이 혀끝을 감쳤다. 바삭바삭한 한과는 달착지근 눈처럼 녹았다. 송홧가루 다식은 입안 가득 솔 향을 뿜는다.
설날 아침 차례상을 물리기 바쁘게 세뱃돈을 받으러 집을 나선다. 고향엔 친척들이 올망졸망 이웃해 살았으나 세뱃돈을 선 듯 내 줄 형편이 되는 집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주전부리할 돈은 챙길 수 있었으니 그게 어딘가. 객지로 돈 벌러 나간 형과 누나에게 선물 받은 학용품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설이 다가오면 이웃 간에 주고받은 선물은 계란꾸러미 곶감 찹쌀 등 제사상에 요긴한 식재료들이다. 설탕과 조미료, 비누와 치약은 고급 선물이다. 설날엔 풍년과 복을 기원하며 복조리를 사서 매달았다. 가족 가운데 삼재(三災)에 해당하는 띠가 있으면 세 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까지는 축제의 연속이다. ‘척사대회’로 불리던 윷놀이는 설 민속놀이의 꽃이다. 여자들은 널뛰기를 하고 아이들은 연날리기와 썰매타기, 팽이치기로 신바람을 냈다. 마을 농악대는 집집마다 돌며 무사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를 한다. 집주인은 음식이나 곡식, 돈으로 대접을 한다.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를 끝으로 보름간에 걸친 설 축제의 막이 내린다. 설은 같은 언어를 쓰는 단일 문화민족의 동질성이 녹아있는 한마당 어울림 축제다.
일제는 고유의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설을 없애려 떡을 못 만들게 섣달그믐께는 일주일 동안 떡 방앗간 문을 닫게 하는 횡포를 부렸다. 8.15 광복 이후에는 ‘이중과세’라는 명분으로 음력설을 홀대하는 정책을 폈다. 우리나라는 ‘태양력’을 채택한 1896년 1월 1일 이후 ‘양력설’과 ‘음력설’이 병존하면서 ‘신정’과 ‘구정’ 논란이 이어지다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설 명절 분위기가 갈수록 퇴색되면서 민족대이동의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밤새워 귀성표를 구하던 풍경은 흑백 풍경이 됐다. 도로와 교통수단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올해 코레일 설 승차권 예매율은 34.6%에 불과하다. 귀성 인구가 준다는 건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농촌진흥청 조사에 따르면 설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가구는 10가구 중 6.5가구로 나타났다. 대가족의 해체와 1인 가구의 증가, 성 평등과 노동 형평성 논란 등 명절 후유증이 확산되면서 제사 무용론이 고개를 든다. 정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주고 주고받던 선물도 김영란법 이후 줄었다.
설 연휴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나 홀로 집에서 자신만을 위한 여가와 충전의 시간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늘었다. ‘혼놀족’을 위한 다양한 상품 마케팅도 세태의 반영이다. 설은 흩어졌던 가족이 모이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미풍양속의 전통이다. 그 때 그 시절의 설 분위기 회복은 불가능하더라도 민족의 정과 얼이 스민 설 명절의 전통적 가치는 면면히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