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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서원과 제사

[강판권 교수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서원과 제사

by 강판권 교수님 2019.07.15

우리나라의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중요한 공간이었다. 서원은 지금의 사립대학에 해당할 만큼 조선시대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정부에서 인정한 이른바 ‘사액서원(賜額書院)’은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서원의 위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한 9곳의 서원도 모두 사액서원이었다. 서원은 크게 제사, 교육, 도서관 등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 가지 기능 중에서 제사를 가장 중시했다. 서원은 서원관련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모시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제사는 대상자를 기리는 중요한 의식이다. 의식은 제사의 주인공을 공경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는 서원만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유교식 제사를 치르는 경우가 아주 많다. 아직도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의식에는 제사를 통해 조상의 음덕을 기대하는 심리가 깔려있다. 이른바 제사의 기복신앙은 유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이다. 기복신앙은 종교의 생명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기복제사는 적잖은 갈등을 일으킨다. 특히 각 가정의 제사는 가정불화의 중요한 요인이다. 각 가정의 제사가 대부분 기복을 넘어 노동의 제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의 제사는 농업사회와 대가족 제도 아래에서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의 제사 방식은 현대사회에서는 근원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집집마다 제사를 둘러싼 갈등이 잦은 것도 제사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 중 하나는 탁월한 보편성이다. 중국에서 수입한 우리나라의 서원은 유교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유지·보급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유교문화의 보편적 가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기능이 아니라 교육기능이다. 서원의 교육기능은 인간 본성의 구현이다. 인간 본성은 하늘이 부여한 착한 본성이다. 착한 본성을 드러내는 과정이 바로 교육이고, 본성을 구현하면 성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서원이 지닌 건축 가치도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간 우리나라 서원의 운영은 대부분 제사기능에 머물고 있다. 만약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제사기능 혹은 예절을 강조한다면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서원은 성리학의 본질을 이해·실천할 수 있는 교육 공간으로 운영할 때만이 보편성을 유지·확산할 수 있다. 제사기능은 현대사회에 걸맞지 않다. 그래서 서원은 찾는 사람들에게 선조들이 실천한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신을 위한 배움’의 정신을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위기지학’의 정신은 공자 이래 모든 후계자들이 추구한 이상이었고, 수 백 년 동안 서원을 유지한 핵심 철학이었다. 더욱이 위기지학의 철학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학문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 부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한다면 서원의 가치는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제 제사는 기복의 제사에서 기억의 제사로 전환하고, 서원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인 인간본성, 즉 창의성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실천해야 한다. 이 같은 실천은 곧 우리나라가 문화선진국으로 가느냐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