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스님] 삶이란 참는 것이 아닌 견디며 사는 것
[정운 스님] 삶이란 참는 것이 아닌 견디며 사는 것
by 정운 스님 2019.08.13
18세기 선애스님은 미술의 대가였다. 스님은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출중해 주변에서 글씨를 써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부자가 스님을 찾아와 자신 집안에 대대로 남을 가훈 하나를 부탁했다. 스님은 이렇게 글씨를 써주었다.
“아버지가 죽고, 다음 자식이 죽은 뒤에 손자가 죽다[父死 子死 孫死].”
부자는 글씨를 보고 역정을 내며, 스님에게 말했다.
“아니! 스님, 후손들에게 삶에 지침이 될 만한 좋은 구절을 써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온통 불길한 구절만 써주시다니요!!”
(스님은 당연하다는 듯) “이보다 더 좋은 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가령 아들이 그대 앞서서 죽는다면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을 것이며, 그대 손자 또한 그대 앞서서 죽는다면 이 또한 슬픈 일이 어디 있겠소! 그대 가족이 내가 써준 대로 순서대로 죽는다면, 이 또한 그대의 복이 될 것이요.”
일전에 어느 스님[서울 정각사 광우]이 입적했는데, 세납이 95세였다. 스님은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 이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스님께서는 살아생전 젊은 스님들한테 귀감이 될 만큼 수행도 깊었고, 열심히 정진했던 분이다. 문상을 다녀왔는데, 무슨 조화일까? 장례식을 다녀오면 슬프거나 우울해야 하는데, 오히려 파티에 다녀온 기분이다. 일반적으로 연세가 들어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하는데, 스님의 입적이 그러하다. 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이생에서의 스님 인생은 완결[入寂:수행을 잘 하고 寂滅 세계에 들어감]이었기 때문이다.
스님 장례식에 다녀온 날, 인터넷을 비롯해 뉴스에 슬픈 내용이 올라왔다. 부산에서 36세 여성이 고독사를 했는데, 죽은 지 40여 일 만에 발견되었다. 공과금이 밀리고 세 달 치 집세를 내지 않아 주인이 집에 들어가 보니 죽어있던 것이다. 고인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근자에 노년층만이 아닌 젊은층들에게도 고독사가 늘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젊은이들이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의 이야기처럼, 나이 순서대로 혹 오래 산 순서대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들의 입장은 충분히 공감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승려의 삶을 살고 있는 필자도 가끔 우울감에 빠지거나 삶의 의미를 잃을 때가 있다. 삶은 즐거움보다 고난이 더 많은 법이다. 한 번쯤 생각해보자! 그대가 자살한다면 부모와 가족은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면서 힘들어한 것보다 평생을 처절하게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50세가 넘어 문단에 등단한 고 박완서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은 참고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고인보다 나이 든 어른들은 (설령 인연이 없을지라도) 젊은이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한다. 인생은 참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임을 상기하자. 잠깐 아니 한 단계의 힘든 고비를 견디고 나면, ‘잘 견뎠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격려할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다음 자식이 죽은 뒤에 손자가 죽다[父死 子死 孫死].”
부자는 글씨를 보고 역정을 내며, 스님에게 말했다.
“아니! 스님, 후손들에게 삶에 지침이 될 만한 좋은 구절을 써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온통 불길한 구절만 써주시다니요!!”
(스님은 당연하다는 듯) “이보다 더 좋은 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가령 아들이 그대 앞서서 죽는다면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을 것이며, 그대 손자 또한 그대 앞서서 죽는다면 이 또한 슬픈 일이 어디 있겠소! 그대 가족이 내가 써준 대로 순서대로 죽는다면, 이 또한 그대의 복이 될 것이요.”
일전에 어느 스님[서울 정각사 광우]이 입적했는데, 세납이 95세였다. 스님은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 이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스님께서는 살아생전 젊은 스님들한테 귀감이 될 만큼 수행도 깊었고, 열심히 정진했던 분이다. 문상을 다녀왔는데, 무슨 조화일까? 장례식을 다녀오면 슬프거나 우울해야 하는데, 오히려 파티에 다녀온 기분이다. 일반적으로 연세가 들어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하는데, 스님의 입적이 그러하다. 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이생에서의 스님 인생은 완결[入寂:수행을 잘 하고 寂滅 세계에 들어감]이었기 때문이다.
스님 장례식에 다녀온 날, 인터넷을 비롯해 뉴스에 슬픈 내용이 올라왔다. 부산에서 36세 여성이 고독사를 했는데, 죽은 지 40여 일 만에 발견되었다. 공과금이 밀리고 세 달 치 집세를 내지 않아 주인이 집에 들어가 보니 죽어있던 것이다. 고인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근자에 노년층만이 아닌 젊은층들에게도 고독사가 늘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젊은이들이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의 이야기처럼, 나이 순서대로 혹 오래 산 순서대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들의 입장은 충분히 공감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승려의 삶을 살고 있는 필자도 가끔 우울감에 빠지거나 삶의 의미를 잃을 때가 있다. 삶은 즐거움보다 고난이 더 많은 법이다. 한 번쯤 생각해보자! 그대가 자살한다면 부모와 가족은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면서 힘들어한 것보다 평생을 처절하게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50세가 넘어 문단에 등단한 고 박완서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은 참고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고인보다 나이 든 어른들은 (설령 인연이 없을지라도) 젊은이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한다. 인생은 참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임을 상기하자. 잠깐 아니 한 단계의 힘든 고비를 견디고 나면, ‘잘 견뎠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격려할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