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판권 교수님] 내 마음의 나무
[강판권 교수님] 내 마음의 나무
by 강판권 교수님 2019.10.14
사람마다 마음속에 간직한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살다 보면 마음에 담아둘 만한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에 담아두는 나무는 그냥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사연이 있다. 저마다 사연을 품고 있기 때문에 나무에 대한 사랑도 애틋할 수밖에 없다. 나무도 삶의 사연이 있다. 나무는 사람처럼 기록을 하지 못할 뿐이지 생명체라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과 기쁨을 겪는다. 사람이 한 그루 나무를 가슴에 품는 순간 나무의 얘기와 만난다. 두 생명체가 갖고 있는 얘기는 때론 신화로 탄생하기도 하고, 때론 전설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화와 전설은 대부분 간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간절한 내용이라야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은 대부분 기쁨보다는 슬픔을 담고 있다. 슬픔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기쁨보다는 아픔을 오래 기억한다. 흔적이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까지 아픔과 관련한 것들이 몸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나무와 관련해서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곰솔에 대한 것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전까지 초가집에서 살았다. 집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푸세식 화장실은 집안에 있지 않고 대문 밖에 있었다. 그래서 밤에 대변을 보려면 반드시 대문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나는 어느 날 대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가 혼비백산하고 집으로 돌아온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대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앉는 순간, 눈앞에 ‘귀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귀신이 아니라 소나뭇과의 늘푸른큰키나무 곰솔이었다. 내가 곰솔을 귀신으로 착각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화장실에서 혼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두려움 그 자체인데 검은 자태의 곰솔을 보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귀신으로 착각한 곰솔은 어린 시절부터 그네를 매달아 놀았던 나무였다. 더욱이 고향 뒷산인 마음산(馬飮山)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라서 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마음속의 곰솔은 기쁨과 아픔이 공존하는 나무다. 그런데 내 마음속의 한 그루 곰솔은 나만의 추억을 간직한 나무가 아니라 당시 나무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추억을 선사한 존재였다. 그러나 곰솔에 대한 추억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무를 기억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고향의 곰솔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고향에 가보니 곰솔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태풍에 쓰러져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곰솔은 사라졌지만 곰솔에 대한 추억은 진하게 남아 있다.
나무에 대한 추억에도 보편성과 특수성이 존재한다. 곰솔에 대한 추억은 곰솔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편성을 띠지만, 곰솔에 대한 기억 방식은 각각 달라서 특수성을 갖는다. 이처럼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제공하는 나무는 한 인간의 추억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다. 나무에 대한 추억은 어린 나일수록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어떤 나무를 만나느냐는 한 인간의 마음속 나무를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속의 나무를 묻고 싶다.
신화와 전설은 대부분 간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간절한 내용이라야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은 대부분 기쁨보다는 슬픔을 담고 있다. 슬픔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기쁨보다는 아픔을 오래 기억한다. 흔적이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까지 아픔과 관련한 것들이 몸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나무와 관련해서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곰솔에 대한 것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전까지 초가집에서 살았다. 집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푸세식 화장실은 집안에 있지 않고 대문 밖에 있었다. 그래서 밤에 대변을 보려면 반드시 대문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나는 어느 날 대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가 혼비백산하고 집으로 돌아온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대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앉는 순간, 눈앞에 ‘귀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귀신이 아니라 소나뭇과의 늘푸른큰키나무 곰솔이었다. 내가 곰솔을 귀신으로 착각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화장실에서 혼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두려움 그 자체인데 검은 자태의 곰솔을 보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귀신으로 착각한 곰솔은 어린 시절부터 그네를 매달아 놀았던 나무였다. 더욱이 고향 뒷산인 마음산(馬飮山)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라서 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마음속의 곰솔은 기쁨과 아픔이 공존하는 나무다. 그런데 내 마음속의 한 그루 곰솔은 나만의 추억을 간직한 나무가 아니라 당시 나무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추억을 선사한 존재였다. 그러나 곰솔에 대한 추억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무를 기억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고향의 곰솔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고향에 가보니 곰솔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태풍에 쓰러져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곰솔은 사라졌지만 곰솔에 대한 추억은 진하게 남아 있다.
나무에 대한 추억에도 보편성과 특수성이 존재한다. 곰솔에 대한 추억은 곰솔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편성을 띠지만, 곰솔에 대한 기억 방식은 각각 달라서 특수성을 갖는다. 이처럼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제공하는 나무는 한 인간의 추억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다. 나무에 대한 추억은 어린 나일수록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어떤 나무를 만나느냐는 한 인간의 마음속 나무를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속의 나무를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