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섭 시인님] 아름다운 삶, 잊혀버린 기억
[이규섭 시인님] 아름다운 삶, 잊혀버린 기억
by 이규섭 시인님 2019.11.22
500억 기부한 91세 배우 신영균 “내 관엔 성경책만 넣어 달라”
최근 원로배우 신영균 씨의 중앙일보 인터뷰 표제가 눈길을 끌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기사다.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한 시대를 풍미한 은막의 대 스타답다. 죽은 뒤 관 속에 넣어 달라는 성경은 영혼의 손때가 40∼50년 동안 묻어 낡고 헤졌다.
그는 500억 원 규모의 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박물관 등에 쾌척한 바 있다. 명보극장은 그의 보물 1호다. 1977년 7억 5000만 원에 인수했던 극장의 자산 가치는 40년 새 60배 넘게 뛰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 기금으로 기부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60∼70년대 1년에 집 10채를 살 돈을 출연료로 받은 연예계 최고의 자산가다. 앞으로 남은 재산도 사회에 환원하겠다니 영화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신영균은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한 뒤 배우의 길을 걸었다. 1960년대 조긍하 감독의 ‘과부’를 통해 데뷔한 뒤 60여 년간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8년 영화 ‘화조’를 끝으로 은막에서 은퇴했다. 출세작인 ‘빨간 마후라’는 고교시절 단체로 관람했다. 비행기를 타보기는커녕 여객기조차 구경 못했던 시골 까까머리 학생에겐 황홀한 스펙터클이었다.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르는’ 공군 조종사들이 멋져 보였다. 1964년 명보극장 개봉 당시 매표소 앞은 장사진이었고 암표가 처음 등장했다. 개봉관 관객 수는 25만 명으로 서울 인구 100만 명의 4분의 1이 본 셈이다.
1962년에 개봉한 ‘연산군’도 단체로 봤다. 시네마스코프에 총천연색이었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미워도 다시 한번’(1968년)은 아역 스타 김정훈을 탄생시켰다. 신영균 주연의 60년대 대표작들을 봤으니 올드 팬이다. 돈이 많아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벌벌 떠는 사람들이 많은 데 모은 재산을 나누는 삶은 참 아름답다.
100살까지 연기하고 싶다던 영화배우 윤정희 씨가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려 딸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은 안타깝다. 그는 1960∼197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활약하며 스크린을 누볐다. 1966년 신인배우 오디션에 1200대 1 경쟁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 주인공으로 데뷔한 그녀는 주연을 맡은 영화만 325편이나 된다. 대종상 등 여우주연상을 25회 수상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우(女優)다.
요염과 청순이 공존하는 이미지, 지적 연기로 시대를 가로질러온 그녀는 문학작품을 소재로 한 영화에 유난히 많이 출연한 것으로 기억된다. 김승옥 작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1967년), 이어령 소설 ‘장군의 수염’(1968년),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1969년), 방영웅의 ‘분례기(1971년), 김동리 ’무녀도‘(1972년) 등의 주인공을 맡아 폭넓은 연기를 펼쳤다. 소중했던 시간들을 반추할 능력을 상실한 치매는 슬픈 병이지만 그녀는 아름다움 여배우로 기억될 것이다.
최근 원로배우 신영균 씨의 중앙일보 인터뷰 표제가 눈길을 끌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기사다.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한 시대를 풍미한 은막의 대 스타답다. 죽은 뒤 관 속에 넣어 달라는 성경은 영혼의 손때가 40∼50년 동안 묻어 낡고 헤졌다.
그는 500억 원 규모의 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박물관 등에 쾌척한 바 있다. 명보극장은 그의 보물 1호다. 1977년 7억 5000만 원에 인수했던 극장의 자산 가치는 40년 새 60배 넘게 뛰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 기금으로 기부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60∼70년대 1년에 집 10채를 살 돈을 출연료로 받은 연예계 최고의 자산가다. 앞으로 남은 재산도 사회에 환원하겠다니 영화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신영균은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한 뒤 배우의 길을 걸었다. 1960년대 조긍하 감독의 ‘과부’를 통해 데뷔한 뒤 60여 년간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8년 영화 ‘화조’를 끝으로 은막에서 은퇴했다. 출세작인 ‘빨간 마후라’는 고교시절 단체로 관람했다. 비행기를 타보기는커녕 여객기조차 구경 못했던 시골 까까머리 학생에겐 황홀한 스펙터클이었다.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르는’ 공군 조종사들이 멋져 보였다. 1964년 명보극장 개봉 당시 매표소 앞은 장사진이었고 암표가 처음 등장했다. 개봉관 관객 수는 25만 명으로 서울 인구 100만 명의 4분의 1이 본 셈이다.
1962년에 개봉한 ‘연산군’도 단체로 봤다. 시네마스코프에 총천연색이었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미워도 다시 한번’(1968년)은 아역 스타 김정훈을 탄생시켰다. 신영균 주연의 60년대 대표작들을 봤으니 올드 팬이다. 돈이 많아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벌벌 떠는 사람들이 많은 데 모은 재산을 나누는 삶은 참 아름답다.
100살까지 연기하고 싶다던 영화배우 윤정희 씨가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려 딸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은 안타깝다. 그는 1960∼197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활약하며 스크린을 누볐다. 1966년 신인배우 오디션에 1200대 1 경쟁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 주인공으로 데뷔한 그녀는 주연을 맡은 영화만 325편이나 된다. 대종상 등 여우주연상을 25회 수상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우(女優)다.
요염과 청순이 공존하는 이미지, 지적 연기로 시대를 가로질러온 그녀는 문학작품을 소재로 한 영화에 유난히 많이 출연한 것으로 기억된다. 김승옥 작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1967년), 이어령 소설 ‘장군의 수염’(1968년),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1969년), 방영웅의 ‘분례기(1971년), 김동리 ’무녀도‘(1972년) 등의 주인공을 맡아 폭넓은 연기를 펼쳤다. 소중했던 시간들을 반추할 능력을 상실한 치매는 슬픈 병이지만 그녀는 아름다움 여배우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