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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박사님] 나무의 온도와 박수근의 그림

[강판권 박사님] 나무의 온도와 박수근의 그림

by 강판권 박사님 2019.12.16

겨울은 대부분의 생명체에게 힘든 시간이다. 나무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잎이 떨어진 나무를 보면 왠지 마음이 쓸쓸하다. 어느 날, 카페에 들렸다가 나무에 걸린 온도계를 보니, 순간 나무의 온도가 궁금해서 온도계를 구입했다. 나무가 견딜 수 있는 온도는 나무마다 다르다. 나는 온도계를 들고 다니면서 나무마다 온도를 재어보았다. 내가 나무의 온도를 재는 것은 단순히 실제 나무의 온도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무에 온도계를 대면 나무가 살고 있는 공간의 온도와 거의 같기 때문에 굳이 재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나무의 온도를 재는 것은 겨울에 진정으로 나무와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겨울에는 나무를 진정으로 만나지 않는다. 나무의 단풍이 지고 나면 모른 척한다. 나무의 꽃과 잎과 열매의 아름다움에 그토록 열광했던 모습을 정말 순식간에 잊어버린다. 그래도 나무에 대한 일말의 사랑이라도 남아 있다면 겨울철에도 나무와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같은 마음은 세상의 일에도 필요하다. 겨울 나무에 마음을 갖는 것은 연말에 힘든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잎 떨어진 나무를 바라보면서 박수근의 작품을 떠올린다. 1950년 작품 <<노상>>에서 잎이 떨어진 나무 사이로 머리에 물건을 이고 가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무척 시리다. 잎 떨어진 나무와 여인의 행상 모습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1959년 박수근의 <<귀로>> 역시 행상의 여인과 자식 한 명이 잎 떨어진 나무가 살고 있는 마을 앞을 지나고 있는 장면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따뜻해야 하지만. 잎 떨어진 나무가 있는 마을에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고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내가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고향 들판에서 추수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차가운 공기를 마주하면서 손에는 물건을 쥐고 집으로 돌아가면 기다리는 것은 어둠과 또 다른 일들이다. 집에 도착하면 무거운 어깨를 놓일 틈도 없이 소죽을 끓이는 일을 빠른 속도로 해야 한다. 그동안 어머니는 저녁밥을 짓는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곧장 다음날 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잠자리에 누우면 고단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곤하게 잠든다.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의 박수근 작품 <<판자촌>>에도 잎 떨어진 나무가 등장한다. 판자촌은 나무들의 가지에 안겨 있다. 잎 떨어진 나무는 판자촌의 속내를 드러낸다. 잎 떨어진 나무들은 판자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60년 두 편의 <<고목과 행인>>도 잎 없는 고목을 통해 행인의 고통을 드러낸다. 같은 해의 작품 <<휴식>>도 4명의 여인들이 잎 없는 고목 아래서 쉬고 있다. 1960년의 작품 중 <<고목>> , <<나무와 두 여인>> , 1964년 작품 중 <<고목과 아이들>>· <<나무와 여인>>·<<귀로>> , 1965년 작품 <<귀로>>·<<나무와 사람들>> , 수채 드로잉 작품 중 1954년 <<무제>>, 1960년 <<나무>>에도 나무에 잎이 없다. 떨어진 나뭇잎은 다시 피어나니, 박수근의 작품에는 쓸쓸함 속에 희망이 싹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