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우리는 지금 자가격리 중
[권영상 작가님] 우리는 지금 자가격리 중
by 권영상 작가님 2020.04.16
이른 아침부터 바쁘다. 딸아이에게 가져다 줄 반찬 때문이다. 딸아이는 지금 자가격리 중이다. 검진 결과가 나온 지 정확히 13일째다. 아내는 봄나물 반찬을 준비하고 있다. 집둘레에 난 돌나물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원추리 무침과 쑥국을 만들고, 나는 쑥을 덖은 차와 말린 모과를 준비했다. 그리고 딸아이가 필요하다는 것들을 구해 서울로 출발했다.
지난 달 중순이다. 미국의 코로나19 사태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뉴욕이 가까운 곳에서 공부 중인 자식을 둔 부모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듯 안절부절이었다. 어느 날인가.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또 어느 날인가. 대학이 강의를 중단하고 온라인으로 대체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래도 감염 속도가 빠른 여기보다 그쪽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망설이는 사이, 기숙사를 폐쇄한다는 소식이 기어코 날아왔다.
“이제 어떡해야하지? 어떡해야 되는 거지!”
아내는 근심 걱정에 휩싸였고, 뉴욕 주는 셧다운에 들어갔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사라졌고, 미국내 비행편마저 운항횟수가 줄고 있었다. 시시각각 전해오는 딸아이의 소식은 암울했다. 인천 공항으로 오는 비행편이 곧 끊길지도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항공권 예매가 힘들어졌다. 이제 막연히 그쪽 사정이 좋아질 때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죽음과의 싸움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떻든 미국을 떠나야 한다.”
초조한 시간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엑서더스다. 우여곡절 끝에 뉴욕을 떠나 시카고와 나리타공항을 거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출발한지 22시간 뒤인 밤 11시였다. 자가 격리에 들어갈 딸아이를 위해 우리는 서울집을 비웠다. 필요한 것만 간단히 싸들고 심야에 안성을 향해 출발했다. 유학생 입국자 검체 검사와 결과가 늦어지는 바람에 다음날 오전 9시에야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음성이었다.
아, 살았다! 나도 몰래 막혔던 한숨이 나왔다.
그날로부터 우리 가족은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다.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안도했다. 설령 안 좋은 결과가 나왔다 해도 마음이 놓였을 거다. 여기가 우리나라니까. 우리나라라는 게 이렇게 안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파트 마당에 차를 세웠다. 준비해 간 반찬 가방을 들고 숨죽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자식이 자가격리 중이라는 것만으로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분들에게 죄를 짓는 듯 미안했다. 4층에 내려 현관문 앞에 들고 간 것들을 내려놓고 돌아서 나왔다. 그리고는 앞 베란다가 잘 보이는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가 앉았다. 아내가 전화를 걸었다.
“현관문 앞에 둔 반찬 가방 들여다 놓고 앞 베란다로 나오렴.”
잠시 후, 딸아이가 창가에 나왔고, 우리는 먼 거리에서 서로 손을 흔들며 얼굴을 마주했다. 휴대전화로 아내가 못 다 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놀이터를 서성거렸다.
통화가 끝나고 아내가 일어섰다. 우리는 몇 번이나 더 손을 흔들다가 돌아섰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다가 뒤돌아다보니 딸아이가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컥, 눈물 한줌이 쏟아졌다. 내일이면 자가격리가 해제 되는 날이다.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지만 이웃을 위해 한 주일 더 헤어져 살기로 했다. 차를 몰아 다시 안성으로 내려가며 우리는 우리가 입은 옷을 보고 그나마 잠깐 웃었다. 옷차림이 집을 나올 때 입었던 그 한겨울 옷이다.
지난 달 중순이다. 미국의 코로나19 사태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뉴욕이 가까운 곳에서 공부 중인 자식을 둔 부모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듯 안절부절이었다. 어느 날인가.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또 어느 날인가. 대학이 강의를 중단하고 온라인으로 대체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래도 감염 속도가 빠른 여기보다 그쪽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망설이는 사이, 기숙사를 폐쇄한다는 소식이 기어코 날아왔다.
“이제 어떡해야하지? 어떡해야 되는 거지!”
아내는 근심 걱정에 휩싸였고, 뉴욕 주는 셧다운에 들어갔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사라졌고, 미국내 비행편마저 운항횟수가 줄고 있었다. 시시각각 전해오는 딸아이의 소식은 암울했다. 인천 공항으로 오는 비행편이 곧 끊길지도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항공권 예매가 힘들어졌다. 이제 막연히 그쪽 사정이 좋아질 때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죽음과의 싸움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떻든 미국을 떠나야 한다.”
초조한 시간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엑서더스다. 우여곡절 끝에 뉴욕을 떠나 시카고와 나리타공항을 거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출발한지 22시간 뒤인 밤 11시였다. 자가 격리에 들어갈 딸아이를 위해 우리는 서울집을 비웠다. 필요한 것만 간단히 싸들고 심야에 안성을 향해 출발했다. 유학생 입국자 검체 검사와 결과가 늦어지는 바람에 다음날 오전 9시에야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음성이었다.
아, 살았다! 나도 몰래 막혔던 한숨이 나왔다.
그날로부터 우리 가족은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다.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안도했다. 설령 안 좋은 결과가 나왔다 해도 마음이 놓였을 거다. 여기가 우리나라니까. 우리나라라는 게 이렇게 안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파트 마당에 차를 세웠다. 준비해 간 반찬 가방을 들고 숨죽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자식이 자가격리 중이라는 것만으로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분들에게 죄를 짓는 듯 미안했다. 4층에 내려 현관문 앞에 들고 간 것들을 내려놓고 돌아서 나왔다. 그리고는 앞 베란다가 잘 보이는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가 앉았다. 아내가 전화를 걸었다.
“현관문 앞에 둔 반찬 가방 들여다 놓고 앞 베란다로 나오렴.”
잠시 후, 딸아이가 창가에 나왔고, 우리는 먼 거리에서 서로 손을 흔들며 얼굴을 마주했다. 휴대전화로 아내가 못 다 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놀이터를 서성거렸다.
통화가 끝나고 아내가 일어섰다. 우리는 몇 번이나 더 손을 흔들다가 돌아섰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다가 뒤돌아다보니 딸아이가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컥, 눈물 한줌이 쏟아졌다. 내일이면 자가격리가 해제 되는 날이다.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지만 이웃을 위해 한 주일 더 헤어져 살기로 했다. 차를 몰아 다시 안성으로 내려가며 우리는 우리가 입은 옷을 보고 그나마 잠깐 웃었다. 옷차림이 집을 나올 때 입었던 그 한겨울 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