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동백이 피는 섬에서 향일암까지
[권영상 작가님] 동백이 피는 섬에서 향일암까지
by 권영상 작가님 2020.05.01
지난해 3월 31일이었다. 어딘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일었다. 갇혀사는 오랜 겨울 때문이러니 했다. 이럴 때는 문득 행장을 꾸려 나, 다녀오리라, 하고 길을 나서는 게 사내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길눈이 어두웠고, 내비게이션 이용도 서툴렀다. 결국 마음 내켜하지 않는 아내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그러느라 가고 싶었던 경주 남산을 포기하고, 아내가 좋도록 동백 꽃섬을 찾아가기로 했다. 쉽게 양보한 까닭이 또 하나 있었다. 승용차로 아내와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이 실은 부러웠던 거다. 결국 우리의 행선지는 여수 오동도로 결정되었다. 스무 살 무렵, 강릉에 살던 나는 남도의 섬이 그리웠다. 파도와 싸우는 외로운 섬. 시골 청년의 앳된 순정을 안고 그 무렵 찾아간 곳이 여수였다. 그때 내 기억에 오동도 동백이 참 고왔다.
나는 그 기억을 가지고 3월의 마지막 날, 차를 몰아 남으로 출발했다.
험난한 초행길을 달려 마침내 여수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해도 부부여행의 초보자인게 분명했다. 347 킬로미터의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갔던 거다. 순천쯤에서 하루를 쉬고, 그곳의 풍광을 즐긴 뒤 여유있게 가도 될 일이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우리는 웃었지만 우리가 살아온 게 그랬다. 목표를 정하면 쉬지않고 질주했다.
우리는 오동도부터 찾았다. 멀지 않아 해가 질 늦은 오후였다. 3월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섬 입새에서부터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꽃도 꽃도 그 야단스레 피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천지가 동백꽃이었다. 붉게 타는 노을과 짙붉은 동백꽃과 3월이 함부로 어우러져 말 그대로 절정이었다. 낙화를 밟을까봐 발 한 뼘 어디 내디딜 틈이 없었다.
“함께 오기 너무 잘했네!”
아내가 감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는 이미 날이 어둡고 있었다.
동백꽃에 반했는지, 하룻밤을 자고 난 아내 마음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향일암도 가 보자고 했다. 40분 거리. 돌산도 끝 금오산 중턱에 그 절이 있었다. 동백나무 숲길로 난 산비탈 길을 걸어 암자에 들어섰다. 우리는 거기 계신 부처님께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에 대한 감사와 부처님의 건강과 딸아이를 위해 축원을 올렸다.
그리고 나무 밑 그늘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망망한 남녘의 바다를 바라볼 때였다. 난간에 쭈욱 돌아가며 걸려있는 소원을 적은 쪽지들 중의 하나가 문득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아빠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어린 아이의 글씨였다. 처음엔 참 기특하구나, 했다. 그런데 자꾸 우리 아빠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내게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풀잎처럼 흔들렸다.
“하룻밤 숙박비 여기 내놔.” 나는 아내에게 손을 벌렸다.
여유있게 내려왔다면 순천쯤에서 쓰고왔을 숙박비를 여기에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부처님을 찾아들어가 그 아이 아빠의 쾌유를 오래도록 빌었다. 그런 까닭일까. 세상이 더 넓어 보이고 대해가 품에 들어오는 것처럼 아늑했다.
돌아보니 여기 향일암을 오기 위해 겨울동안 나는 먼 바깥이 그리웠고, 경주 남산으로 갈 행선지를 바꾸어 동백을 보러 오동도로 왔다. 동백꽃에 반한 일이며 우연히 이 화엄사의 말사를 찾아온 일도 인연이 있다면 있는 듯 지나온 날이 아득했다.
그날은 허둥대며 올라오는 대신 바다가 보이는 둔덕에 올라 쑥을 캐고, 이튿날 차에 올랐다. 그 아이의 아빠는 자식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다 나았는지...
그러느라 가고 싶었던 경주 남산을 포기하고, 아내가 좋도록 동백 꽃섬을 찾아가기로 했다. 쉽게 양보한 까닭이 또 하나 있었다. 승용차로 아내와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이 실은 부러웠던 거다. 결국 우리의 행선지는 여수 오동도로 결정되었다. 스무 살 무렵, 강릉에 살던 나는 남도의 섬이 그리웠다. 파도와 싸우는 외로운 섬. 시골 청년의 앳된 순정을 안고 그 무렵 찾아간 곳이 여수였다. 그때 내 기억에 오동도 동백이 참 고왔다.
나는 그 기억을 가지고 3월의 마지막 날, 차를 몰아 남으로 출발했다.
험난한 초행길을 달려 마침내 여수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해도 부부여행의 초보자인게 분명했다. 347 킬로미터의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갔던 거다. 순천쯤에서 하루를 쉬고, 그곳의 풍광을 즐긴 뒤 여유있게 가도 될 일이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우리는 웃었지만 우리가 살아온 게 그랬다. 목표를 정하면 쉬지않고 질주했다.
우리는 오동도부터 찾았다. 멀지 않아 해가 질 늦은 오후였다. 3월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섬 입새에서부터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꽃도 꽃도 그 야단스레 피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천지가 동백꽃이었다. 붉게 타는 노을과 짙붉은 동백꽃과 3월이 함부로 어우러져 말 그대로 절정이었다. 낙화를 밟을까봐 발 한 뼘 어디 내디딜 틈이 없었다.
“함께 오기 너무 잘했네!”
아내가 감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는 이미 날이 어둡고 있었다.
동백꽃에 반했는지, 하룻밤을 자고 난 아내 마음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향일암도 가 보자고 했다. 40분 거리. 돌산도 끝 금오산 중턱에 그 절이 있었다. 동백나무 숲길로 난 산비탈 길을 걸어 암자에 들어섰다. 우리는 거기 계신 부처님께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에 대한 감사와 부처님의 건강과 딸아이를 위해 축원을 올렸다.
그리고 나무 밑 그늘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망망한 남녘의 바다를 바라볼 때였다. 난간에 쭈욱 돌아가며 걸려있는 소원을 적은 쪽지들 중의 하나가 문득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아빠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어린 아이의 글씨였다. 처음엔 참 기특하구나, 했다. 그런데 자꾸 우리 아빠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내게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풀잎처럼 흔들렸다.
“하룻밤 숙박비 여기 내놔.” 나는 아내에게 손을 벌렸다.
여유있게 내려왔다면 순천쯤에서 쓰고왔을 숙박비를 여기에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부처님을 찾아들어가 그 아이 아빠의 쾌유를 오래도록 빌었다. 그런 까닭일까. 세상이 더 넓어 보이고 대해가 품에 들어오는 것처럼 아늑했다.
돌아보니 여기 향일암을 오기 위해 겨울동안 나는 먼 바깥이 그리웠고, 경주 남산으로 갈 행선지를 바꾸어 동백을 보러 오동도로 왔다. 동백꽃에 반한 일이며 우연히 이 화엄사의 말사를 찾아온 일도 인연이 있다면 있는 듯 지나온 날이 아득했다.
그날은 허둥대며 올라오는 대신 바다가 보이는 둔덕에 올라 쑥을 캐고, 이튿날 차에 올랐다. 그 아이의 아빠는 자식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다 나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