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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우산雨山’ 풍경

[강판권 교수님] ‘우산雨山’ 풍경

by 강판권 교수님 2020.05.04

봄날, 산에 가면 산이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다. 갈잎나무가 만든 꽃과 잎이 속 빈 산을 가득 메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 산은 들어가는 순간 기분이 부푼다. 얼마 전 비 내리는 날, 우산을 쓰고 집 근처 산에 갔다. 비 오는 날에는 산을 찾는 사람들도 드물어서 아주 조용하다. 나는 ‘비 내리 산’을 ‘우산雨山’이라 부른다. ‘우산雨山’은 비를 막는 우산雨傘과 같은 발음이다. 비 내리는 날 산에 들어가면 비를 맞이하는 식물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비 내리는 산은 냄새부터 다르다. 흙 내음과 함께 식물에서 품어 나오는 향기는 건조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든다.
산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많은 조건을 제공한다. 조선 중기 권문해(1534-1591)는 『대동운부군옥』에서 산을 ‘산産’이라 풀이했다. 권문해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고, 『대동운부군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권문해가 산을 산(産)이라 풀이한 것은 산이 만물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비오는 날 만난 식물은 아주 많다. 산에서 식물을 관찰하면서 걷다보면 정말 행복하다. 산 초입 언덕에서는 장미과의 갈잎떨기나무 가침박달을 만났다. 인근 산에서 흔히 만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면서도 세계에서도 아주 귀한 존재다. 내가 만난 가침박달은 아직 어려서 박달나무의 줄기처럼 너덜너덜한 껍질을 볼 수 없다. 가침박달의 하얀 꽃은 숨이 멎을 만큼 청순하다. 가침박달은 장미과라서 꽃잎이 다섯 장이고, 열매도 꽃잎 수만큼 다섯 개로 갈래진다. 열매의 모양이 마치 바늘쌈처럼 닮았다. 그래서 가침박달이라 부른다.
산의 초입에서 언덕을 올라 산등성이에 도착하면 정자와 운동기구가 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정자에 앉으면 빗소리가 쇼팽의 빗방울전주곡으로 들린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장미과의 갈잎떨기나무 조팝나무가 웃음 땐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는 조팝나무의 꽃은 벼과의 일년생 풀인 조를 튀긴 모습 같다. 자잘한 꽃송이를 바라보면 다섯 장의 꽃잎이 정말 앙증맞다. 꽃잎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금세 거친 세월을 잊는다. 아내가 가길 재촉해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인동과의 갈잎떨기나무 분꽃나무에서 품어 나오는 분 냄새 때문에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해발 300미터 남짓한 산등성이에는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참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신갈나무의 긴 꽃이 바람에 그네를 탄다. 잎은 아직 작고 부드러워서 신발의 깔창으로 사용할 수 없다.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오솔길로 접어드니, 마주한 산자락이 눈을 맞춘다. 새로 돋은 잎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오라고 손짓한다. 풋풋한 냄새는 거친 숨소리를 가라앉힌다. 오솔길을 따라 약간 굽은 길로 들어서니 복사꽃이 사랑을 부른다. 다섯 장의 꽃잎이 바람이 날리는 모습은 바로 무릉도원이다. 조선시대의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을 무릉도원으로 묘사했다. 복사나무의 분홍꽃은 사랑을 상징한다. 사랑을 뒤로 하고 발길을 옮기자마자 할미꽃이 발목을 잡는다. 고개 숙인 할미꽃이, 아! 이 맘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소환했다. 나는 주저앉아 한참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바람소리에 평소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별일 없제. 밥 잘 챙겨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