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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스님] 큰 바위 얼굴

[정운 스님] 큰 바위 얼굴

by 정운 스님 2020.05.11

고등학교 때, 국어 책에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이 늘 마음속에 남아 있다. 1850년 너새니얼 호손이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주인공 어니스트(Ernest)는 계곡 마을에서 살아간다. 그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 자연과 함께 하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살고 있다. 남북전쟁 직후, 소년 어니스트는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이 탄생할 거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평생을 한 번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위대한 인물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살았다. 세월이 흘러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번 부자였다. 그런데 곧 마을 사람들은 실망했다. 성자 다운 덕이 없는 데다 전혀 큰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아서다. 이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 말을 잘하는 정치인, 글을 잘 쓰는 시인들이 마을에 나타났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한 시인이 그를 가리키며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이다’라고 외쳤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큰 바위 얼굴이 어니스트라고 인정한다.
사람들이 수긍할 만큼 어니스트는 평생을 그곳에 사는 동안 진실하고 겸손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을 보며 참다운 사람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고결함과 진지함이 어니스트를 큰 바위 얼굴로 변하게 한 거라고 생각된다.
불교를 우상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불상은 불자들이 섬기는 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 위대한 성자가 된 석가모니 부처를 상징한 것이고, 불자들은 석가모니 상을 롤 모델로 삼아 인격을 연마하라는 뜻이다.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을 연마하고, 성찰하였듯이…
원고의 원 취지로 돌아가자. 우리는 대체로 큰돈을 벌어야 하고, 높은 명예를 얻어야 성공한 거라고 본다. 필자도 종단 소임을 살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이 마치 출세한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조금 민망한 일이다. 솔직히 필자는 그 소임에 들어가기 전에 그런 위치인지도 몰랐고, 그 자리에 있다고 으스대지도 않는다. 믿고 믿지 않고는 각자에 맡긴다.
중국에서 역대로 <고승전>이 몇 차례 편찬되었다. 최초로 편찬한 혜교(497~554)는 서문에 이렇게 언급하였다.
“참되게 행동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빛을 감추는 사람은 고매하지만 유명하지 않다. 덕은 적으면서 시류에 맞춰 사는 사람은 유명하지만 고매하지 않다.” 그러면서 혜교는 고승高僧과 명승名僧을 구별하면서 명성은 있어도 덕행이 부족한 스님은 <고승전>에 실지 않았다고 하였다. 곧 사람들은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덕 있는 스승을 요구했던 것이다.
다시 큰 바위 얼굴로 돌아가자. 우리가 삶을 마감하면서 무엇이 가장 애틋하게 다가올까? 돈과 명예를 얻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다듬지 못한, 자신을 덕스럽게 하지 못한 부족에 회한이 있을 거라고 본다. 이 글을 보는 시점부터라도 우리 삶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보자. 그리고 그 답은 각자가 내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