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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스승이 아니라 교사이고 싶다”

[이규섭 시인님] “스승이 아니라 교사이고 싶다”

by 이규섭 시인님 2020.05.14

중학교 때 국어와 한문을 가르친 송지향(宋志香) 선생님은 타계한지 오래됐어도 잊히지 않는 스승이다. 여성 이름 같지만 긴 수염에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교단에 섰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전형적인 선비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떠들어도 호통치지 않고, 헛기침으로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은퇴 후엔 소백산 자락 움막에 홀로 기거하며 한학과 서예에 정진하던 기인의 면모도 보였다.
학창시절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지만 각박한 현실에 얽매이다 보니 스승의 은혜를 잊고 살았다. 32년 전 근무하던 신문사로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부근 찻집에서 만났다. 얼굴에 잔주름이 깊어졌을 뿐 건강한 모습이다. 차 한 잔 드신 뒤 가방도 아닌 보자기에 싼 향토지(鄕土誌)를 주시며 신문에 책 소개를 부탁했다.
고향의 역사기록이다. 4×6 배판 판형에 상·하권 2000여 페이지 분량으로 두껍고 무겁다. 선현들이 남긴 문헌과 자료를 뼈대로 현장을 답사하여 확인하고 깊이 있게 기술했다. 옛 시대와 현재의 우리 고장, 자연과 고적, 인맥과 인물, 씨족과 민속 등을 국한문혼용체 문장으로 원고지에 써 내려간 역저다. 국어 선생님에서 향토사학자로 거듭나 큰 업적을 남겼다.
선비의 겸양지덕이랄까. 서문을 써야 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다가 탈고한 뒤 ‘후기’로 대신했다. 박영석(朴永錫) 국사편찬위원장과 언론인 최석채(崔錫采)의 추천사가 머리글을 장식했다.
그 시절 선생님은 엄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밥상머리 교육의 화두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라”라는 당부가 대부분이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다 같다’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관념이 어렴풋이 잔존해 있었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권위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기자고 제정된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는 청원이 이어지고 있으니 아이로니컬하다.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고 청와대에 처음 청원한 것은 2018년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청원자는 “교권 추락은 수수방관하며 교사 패싱으로 일관하는 분위기에서 현장의 선생님들은 스승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소명의식 투철한 교사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다”라고 했다. “유래도 불분명한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라는 호소다.
교사의 권위가 추락한지 오래다. 학생의 잘못을 꾸짖거나 나무라면 경찰에 고소하고 학부모가 달려와 선생님을 질타하는 세상에 스승의 위엄은 간데없다. 미디어 강사로 학교에 드나들다 보니 학부모의 전화만 와도 혹시 민원이 제기되는 건 아닌지 위축된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김영란법 시행은 찬성하나 잠재적 범죄자 취급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선물에 대한 오해를 없애려 휴교를 하는 학교도 늘었다.
최근엔 한 지방의회 의원이 스승의 날 폐지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변질된 스승의 날 대신 교육 주체가 모두 반기는 ‘교육자의 날’을 제정하자고 주장했다. 교사들이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교사의 날‘로 바꾸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