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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스님] 잔인한 민족과 명상자

[정운 스님] 잔인한 민족과 명상자

by 정운 스님 2020.08.24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정복한 사람이 몽골의 칭기즈칸이다. 몽골족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민족’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이런 몽골인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잠재우고, 원나라가 개국되는데 법률적인 초석을 세운 사람이 있다. 바로 요나라의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칭기즈칸의 책사요, 불교적으로는 뛰어난 명상자이다.
상하이대학 역사학자이며 세계적인 문화평론가인 위치우이[余秋雨, 1946∼ ]는 야율초재에 대해 ‘이민족 사람으로서 한족 학자보다 더 뛰어난 문장가요, 학문적 소양을 지닌 사람이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중국 역사가들은 ‘야율초재가 없었다면, 중국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현 중국에서 초재에 관해 평전도 많고, 그의 동상이 중국 전역 수여 곳에 세워져 있다.
야율초재는 27세 무렵, 조동종을 중흥시킨 만송 스님을 만나 참선을 시작했다. 만송은 초재의 문집인 <담연거사문집> 서문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담연 거사는 27세 때부터 나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법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모두 잊었으며, 세간의 명리에 착하지 않았다. 담연은 마음의 도리를 구하여 신묘한 경지를 정밀하게 추구하였다.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참구하기를 3년 만에 도를 얻었다.”
야율초재와 칭기즈칸의 만남을 보자. 칭기즈칸은 끊임없는 전쟁을 하면서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칸은 자신에게 정신적 지주가 될 인물을 백방으로 찾았는데, 요나라의 야율초재가 적격인물이었다. 결국 칭기즈칸은 당시 금나라 지배를 받고 있던 요나라의 야율초재를 책사로 모셨다. 칭기즈칸은 주위 신하들에게 야율초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앞으로 야율초재를 내 곁에 두어 언제든지 자문을 구할 것이다.”
야율초재와 칭기즈칸은 서로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야율초재는 도교의 도사를 초빙해 칭기즈칸이 마음 편할 수 있도록 하였고, 살생의 부도덕성과 생명의 존중성을 일깨워 주었다. 칸이 죽기 한 달 전, 군신들에게 ‘정복을 해도 사람을 살상하지 말고, 노략질하지 말라’는 포고를 내렸다. 또 칸은 자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야율초재는 하늘이 우리 가문에 준 인물이니 그의 뜻에 따라 국정을 행하라.”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이 죽고 나서 2대 오고타이 시대까지 책사를 보냈다. 한 번은 초재가 전쟁 중에 오고타이 칸을 찾아가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가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모두 땅과 백성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땅을 얻어도 백성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물은 풍족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2대 오고타이 왕이 일찍 죽자, 왕비가 섭정을 시작했다. 초재는 왕비와 왕비를 따르는 신하들에게 미움을 받아 정치적으로 숙적 관계였다. 결국 그는 정치적인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55세에 화병으로 죽었다. 초재가 죽자, 정적들은 그의 가산을 몰수해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니, 그의 재산은 거문고와 악기 10여개, 그림 몇 점과 수천 권 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