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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삶의 지혜: 수용성과 관계성

[강판권 교수님] 삶의 지혜: 수용성과 관계성

by 강판권 교수님 2020.10.19

수용성은 모든 생명체의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 수용성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도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행복도 비례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수용성이 뛰어난 존재다. 나무는 수 십 년에서 수 만년 동안 한곳에 살면서 자기 수용성을 길렀다. 나무는 어떤 현실도 거부하지 않고 오로지 수용하면서 삶의 지혜를 터득한 존재다.
내가 나무를 사랑하는 이유도 나무의 뛰어난 수용성 때문이다. 나무를 관찰하면 나무의 수용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무의 뿌리는 수용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다. 대부분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어야 튼튼하지만 비바람이나 사람 혹은 다른 동물들 때문에 뿌리가 밖으로 나온 경우도 적지 않다. 밖으로 나온 뿌리를 보면 그동안 나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나무의 줄기나 가지, 그리고 잎, 꽃과 열매도 수용성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로 힘들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코로나19 이전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아픔을 달래기도 한다. 그런데 삶은 코로나19시대든 이전이든 힘들다. 모든 생명체의 삶은 힘들다. 힘들지 않은 삶이 있다면 그렇게 살면 그만이지만, 그런 삶은 없다. 나무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무는 굳이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힘든 삶을 완벽하게 수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활이 힘들기도 하지만 삶 자체가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수용성의 결여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데는 코로나19로 생활 여건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코로나19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수용성의 결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은 부모에게 태어났다.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한다. 태어난 후에도 성장하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경험한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감당할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도 함께 한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번뇌와 극락, 천국과 고통은 결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아무리 즐거운 일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예컨대 맛난 음식을 먹으면 당장 즐겁지만 맛난 음식을 계속 먹으면 즐거움이 고통으로 변한다. 맛난 음식은 즐거움이자 고통이다.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지만 고통 속에 행복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말끝마다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성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다. 모든 생명체는 애초부터 평등한 관계다. 그러나 스스로 상대방과 평등한 관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만 한다. 더욱이 상대방이 자신을 평등한 관계로 보지 않으면 상대를 욕하면서 정작 자신은 다른 존재에게 불평등으로 바라보면서 쾌감을 맛본다. 이 같은 인간의 이중성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핵심 요인이다.
나무는 다른 존재와 완벽하게 평등한 관계성을 유지한다. 나무가 꽃을 피워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이나 바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서로의 관계는 평등하다. 그러나 인간은 나무에게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지만 나무를 자신과 평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인식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