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기생의 삶, 환대의 삶
[김재은 대표님] 기생의 삶, 환대의 삶
by 뉴시스 기사·사진 제공 2020.10.20
가을빛이 눈부시다.
희로애락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때로는 눈부신 햇빛만큼의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뭐 그리 대수일까. 찬란한 슬픔도 있는 것이니.
도시적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마주할 기회가 많이 없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면 풍요로운 황금들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오곡백과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가끔은 그래볼 일이다.
이렇듯 푸른 들판이며 산들이 오색의 가을빛으로 바뀌어가니 세월이 느껴져 인생의 무상함이 절로 따라온다. 그럼에도 저 깊은 마음 한구석에서 고마움이 한 움큼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무엇보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햇빛과 이를 잘 받아들여 양분을 만들어내는 식물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장 앞서 있다. 광합성이라는 말을 쓰면 아는 척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어서 농부를 필두로 일용할 양식이 내 앞에 이를 때까지 수고한 사람들이며 온갖 것들이 뒤따른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찌 내 삶이 이렇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 주위를 돌아보니 고마워할 것 투성이다.
순간 영화 기생충이 생각났다.
아니 영화보다는 ‘기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내 삶이 바로 고마워하는 모든 것들에 기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엇 하나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서 온갖 것들을 다 누리고 있으니 ‘기생적 삶’을 넘어 ‘기생충’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제는 단순히 동, 식물의 기생 관계는 차치하고라도 사람의 세상은 그 기생 정도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지구별의 지속 가능에 기여하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뭘 그리도 챙겨 먹고 불평, 불만까지 많은지.
생각해보니 인간의 기생적 삶이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 기생과 탐욕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다른 삶을 살 때도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공생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기꺼이 그 길에 나서야 한다. 아니 우리에게도 밥만 축내는 기생적 삶을 넘어 분명 기여할 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작은 것 하나라도 세상과 나누며 그 삶을 즐기면 되니까. 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오르는 한 암자로 가는 포도 위에서 지렁이를 많이 만난다. 환대를 가진 지렁이가 그때마다 나를 환대하는 듯하다. 일개 미물도 그럴지언대 우리도 작은 환대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 했지만 ‘기생’을 넘어 환대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말은 진짜가 되지 않을까. 이 가을날 환대의 마음으로 가을속을 걸으며 내 삶을 돌아본다.
희로애락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때로는 눈부신 햇빛만큼의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뭐 그리 대수일까. 찬란한 슬픔도 있는 것이니.
도시적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마주할 기회가 많이 없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면 풍요로운 황금들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오곡백과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가끔은 그래볼 일이다.
이렇듯 푸른 들판이며 산들이 오색의 가을빛으로 바뀌어가니 세월이 느껴져 인생의 무상함이 절로 따라온다. 그럼에도 저 깊은 마음 한구석에서 고마움이 한 움큼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무엇보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햇빛과 이를 잘 받아들여 양분을 만들어내는 식물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장 앞서 있다. 광합성이라는 말을 쓰면 아는 척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어서 농부를 필두로 일용할 양식이 내 앞에 이를 때까지 수고한 사람들이며 온갖 것들이 뒤따른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찌 내 삶이 이렇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 주위를 돌아보니 고마워할 것 투성이다.
순간 영화 기생충이 생각났다.
아니 영화보다는 ‘기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내 삶이 바로 고마워하는 모든 것들에 기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엇 하나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서 온갖 것들을 다 누리고 있으니 ‘기생적 삶’을 넘어 ‘기생충’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제는 단순히 동, 식물의 기생 관계는 차치하고라도 사람의 세상은 그 기생 정도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지구별의 지속 가능에 기여하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뭘 그리도 챙겨 먹고 불평, 불만까지 많은지.
생각해보니 인간의 기생적 삶이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 기생과 탐욕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다른 삶을 살 때도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공생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기꺼이 그 길에 나서야 한다. 아니 우리에게도 밥만 축내는 기생적 삶을 넘어 분명 기여할 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작은 것 하나라도 세상과 나누며 그 삶을 즐기면 되니까. 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오르는 한 암자로 가는 포도 위에서 지렁이를 많이 만난다. 환대를 가진 지렁이가 그때마다 나를 환대하는 듯하다. 일개 미물도 그럴지언대 우리도 작은 환대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 했지만 ‘기생’을 넘어 환대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말은 진짜가 되지 않을까. 이 가을날 환대의 마음으로 가을속을 걸으며 내 삶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