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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노을에 기대어

[이규섭 시인님] 노을에 기대어

by 이규섭 시인님 2020.10.23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 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가객(歌客) 나훈아가 고대 그리스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형이라 부르며 질문을 던지는 가사는 중장년은 물론 젊은 세대도 열광한다. 온라인에서는 새로운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콘텐츠)으로 떠올랐다. 인기 캐릭터 펭수도 ‘테스 형!’을 부르며 나훈아 열풍에 동참했다.
신곡 ‘테스 형!’은 지난 추석 연휴 비대면 공연으로 KBS 2TV 전파를 타면서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다. “세상이 왜 이래”는 인구에 회자되는 유행어가 됐다. 나훈아의 소신 발언도 화제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고 했다. “KBS가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쏟아내 전국을 들썩였다. 진정성에 울림이 크다.
정치권은 아전인수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함축된 함의는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자는 메시지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공영방송은 국민을 위한 공적 기능을 다해달라는 주문이다.
그는 녹 쓸지 않는 가창력, 정감 넘치는 투박한 사투리, 찢어진 청바지가 어울리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방송 후 “어떤 가수로 남고 싶느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가수는 가수로 남고, 그가 부른 노래로 남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예인(藝人)의 긍지가 느껴진다.
평양 공연 제의를 받은 그는 “이래라저래라 간섭받는 것이 싫다”며 거부했다. 한 때 총선출마 권유를 받고 자신은 노래하는 사람이라며 거절한 일화에서도 뚜렷한 소신과 직업관을 확인할 수 있다. 나훈아의 나이도 일흔 중반. “조만간 은퇴할 것이며 현재도 준비 중”이라니 “너 자신을 알라!”는 테스 형의 의중을 간파하고 있다.
인기와 명예, 권력에 취해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무거운 짐을 지고 끙끙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박경리의 시 ‘옛날의 그 집’이 큰 울림을 주는 것도 버릴 건 버린 뒤에 오는 홀가분함이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하다./늙어서 이리 편함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절창이다.
살아온 날들 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짧기에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늙은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왕년 이야기’는 가급적 입에 올리지 않는다. 건강하게 살다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저승으로 직행하는 게 소망이 됐다.
문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오랜만에 시 원고 청탁을 받았다. 노을에 기대어 낚시를 하노라며 야광찌처럼 젊은 날의 초상과 사랑이 떠오른다. 중년의 해는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지만 한 낯의 햇살은 눈부시다. 은비늘로 빛나던 은어 같은 언어를 자아올리며 언론 현장에서 열성을 쏟던 시절은 강물이 되어 흘러갔다. 수초에 걸린 말과 글의 잔해가 회한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버릴 것 다 버려야 하는 노을 같은 나이, 노을에 기대어 낚시를 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세월에 휜 낚시를 걷고 노을 한 조각 가슴에 품으면 주름진 노을이 더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