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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궤변의 미혹

[이규섭 시인님] 궤변의 미혹

by 이규섭 시인님 2020.12.04

‘처음엔 스쳐가는 바람이려니/ 삭풍에 삭신이 쑤시는/겨울나무의 몸살이려니 여겼다.// 역병의 깨춤에/ 들숨날숨의 가래 끓는 소리/입마개가 말문을 막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이승과 저승까지 갈라놓은 코로나 금줄에// 혼자가 혼자에게 말 걸며 우울을 빗질한다.// 마침내 역병은 죽창이 되고/ 할퀴고 찢긴 광장에 홀로 서서/ 외마디로 외친다.//“차벽(車璧)이 방역(防疫)이냐?”// 하얀 이 드러내고/ 말갛게 웃을 날 언제 오려나.’
최근 한 문학지에 발표한 졸시 ‘코로나 변주’다. 신종 바이러스가 생겼다기에 처음엔 몸살감기처럼 스쳐가는 질병으로 가볍게 생각했다. 바이러스는 계절이 바뀌면 고개를 숙이기 마련인데 갈수록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지구촌 곳곳을 들쑤시고 다닌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럽 사망자만도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피해자 보다 많은 숫자이니 원폭 보다 무서운 존재가 됐다. 코로나 금줄은 장례식장 조문까지 가로막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까지 파고든 격이다. 코로나 방역의 잣대도 이념 대상에 따라 엿장수 가위질 같다.
주춤하는가 싶던 코로나가 찬바람과 함께 기승을 부린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살기 힘들다”는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도심에서 잘나가는 단골 음식점 주인도 “문을 닫아야 하나 더 버텨야 하나” 잠이 안 온다고 호소한다.
연말을 앞두고 예고됐던 각종 모임이 취소되면서 연말 특수를 기대했던 업주들의 한숨도 깊어졌다. 오랜만에 지인에게 전화하여 광화문 부근서 식사나 하자고 했더니 “살인자들이 모이는 근처에 왜 가냐”고 조크 한다. 얼마 전 청와대 고위 당국자가 광화문 집회 주동자를 ‘살인자’라고 한 발언을 빗댄 말이다. 외출하기 두렵고 겁난다며 훗날을 기약한다.
어쩌다 회동한 친구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기분으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고 털어놓는다. 바깥활동을 하는 필자가 부럽다면서. 코로나에 취약한 노모를 모시고 있으니 집 밖으로 나가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란다. 집 부근 한강 공원 산책이 유일한 낙이지만 마스크를 쓰고도 사람과의 거리를 의식하게 된다며 쓴웃음 짓는다.
비정상이 정상의 숨통을 조일 때는 궤변이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 허물을 감추고 프레임을 씌우려 교활한 논법을 동원한다. 궤변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고 미혹에 빠져들게 한다.
허무개그 같은 우스개 가운데 억지스러운 사례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어떤 사람이 소를 훔쳐 갔다가 관가에 잡혀갔다. “왜 남의 소를 훔쳐 갔느냐?”는 원님의 신문(訊問)에 “저는 소를 훔친 적이 없습니다. 길가에 쓸 만한 노끈이 있어 끌고 왔는데 소가 딸려왔을 뿐입니다” 궤변의 극치다.
실정을 호도하기 위해 정치권에서 쏟아내는 아무 말 대잔치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불리하다 싶으면 가짜 뉴스로 내 몬다. 피로하고 짜증 난다. 역겹고 지겹다. 사실을 호도하는 궤변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냉철한 사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