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박사님] 억새와 갈대
[김민정 박사님] 억새와 갈대
by 김민정 박사님 2020.12.14
하얗게 내려앉은 서릿발 이고 서서
운문사 천년 고찰 예불소리 머금으며
언제나 법구경처럼 자비롭게 서 있다
사랑눈빛 모둠하여 노래하며 손짓하고
나 홀로 걷는 길에 다정하게 다가서며
이 세상 하얗게 살자는 소망 하나 전한다
광활한 운문능선 산하를 굽어보며
청아한 은색물결 온 가슴에 안은 채로
갈바람 등에 지고서 운문산을 지킨다
- 정태종, 「운문산 억새」 전문
소설, 대설 다 지난 지금은 겨울이다. 단풍의 계절인 가을이 갈대와 억새에게도 제 격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갈대와 억새는 단풍이 다 떨어진 지금도 강가나 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단풍은 기상상황에 따라 기복이 심하지만, 갈대와 억새는 크게 변동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 단풍을 잘 토라지는 까칠한 애인에, 갈대와 억새는 넉넉한 미소가 아름다운 동반자에 비유되기도 한다. 억새가 유명한 곳으로는 정선의 민둥산 억새밭, 명성상 억새밭, 사자평 억새밭, 합천 황매산의 억새도 유명하다. 위 시조에서는 운문산 억새를 소개하고 있다.
이 시조에선 억새를 ‘하얗게 내려앉은 서릿발 이고 서서/ 운문사 천년 고찰 예불소리 머금으며/ 언제나 법구경처럼 자비롭게 서 있다’고 한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여유롭게 서 있는 억새를 보며 불경인 법구경처럼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자비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 억새가 다정하게 다가서며 ‘이 세상 하얗게 살자는 소망 하나’전한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살고 싶은 화자의 바람을 나타내는 구절이지만, 억새도 그렇게 욕심이 없어 보인다. ‘청아한 은색 물결 온 가슴에 안은 채로/ 갈바람 등에 지고서 운문산을 지키’는 갈대도 아름답게 보인다. 억새는 ‘으악새’라고 불리기도 한다. 유행가에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고 하여 필자도 한때 ‘으악새’가 새의 일종인 줄 알았다.
또한 억새와 갈대는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갈대는 주로 습지 및 냇가, 강가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며, 색은 옅은 갈색이다. 억새는 주로 산에서 살며, 어떠한 땅에서도 억척같이 잘 자란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해안가나 호숫가에는 갈대, 산에는 억새라고 보아야 한다. 갈대와 억새는 모양이 비슷하여 겉으로 봐선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결정적 차이점은 사는 장소이다. 갈대는 물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억새는 산이나 들,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다. 또 갈대는 물가를 떠나서는 자라지 못하고 열매가 조금만 자라도 고개를 숙이는데, 억새는 열매가 자라나도 고개를 쉽게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갈대의 뿌리는 굵고 통통하며 뿌리줄기에 있는 마디를 따라 수염뿌리와 줄기가 다시 올라오기 때문에 뿌리 사이로 잡초들이 자라기도 한다. 억새는 곧고 짧은 뿌리가 촘촘히 얽혀 포기나누기를 하는 것처럼 증식하기 때문에 다른 식물과 함께 자랄 수 없다고 한다.
갈대가 소재가 된 시조도 한 편 소개한다. 새삼 황희 정승 같은 정치가를 그리워하며, 이 시대에도 그런 정치가 한 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울 대로 이운 가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임진강가 갈대들도 제 머리가 무거운지/ 뻣뻣한 고갤 숙이며 옛 생각에 잠깁니다// 너도 옳다, 너도 옳다, 편 가르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우유부단, 손가락질 당했을 법/ 조금 더 높은 곳 바라 끌어안은 맘입니다’ - 「반구정 아래」전문.
운문사 천년 고찰 예불소리 머금으며
언제나 법구경처럼 자비롭게 서 있다
사랑눈빛 모둠하여 노래하며 손짓하고
나 홀로 걷는 길에 다정하게 다가서며
이 세상 하얗게 살자는 소망 하나 전한다
광활한 운문능선 산하를 굽어보며
청아한 은색물결 온 가슴에 안은 채로
갈바람 등에 지고서 운문산을 지킨다
- 정태종, 「운문산 억새」 전문
소설, 대설 다 지난 지금은 겨울이다. 단풍의 계절인 가을이 갈대와 억새에게도 제 격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갈대와 억새는 단풍이 다 떨어진 지금도 강가나 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단풍은 기상상황에 따라 기복이 심하지만, 갈대와 억새는 크게 변동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 단풍을 잘 토라지는 까칠한 애인에, 갈대와 억새는 넉넉한 미소가 아름다운 동반자에 비유되기도 한다. 억새가 유명한 곳으로는 정선의 민둥산 억새밭, 명성상 억새밭, 사자평 억새밭, 합천 황매산의 억새도 유명하다. 위 시조에서는 운문산 억새를 소개하고 있다.
이 시조에선 억새를 ‘하얗게 내려앉은 서릿발 이고 서서/ 운문사 천년 고찰 예불소리 머금으며/ 언제나 법구경처럼 자비롭게 서 있다’고 한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여유롭게 서 있는 억새를 보며 불경인 법구경처럼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자비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 억새가 다정하게 다가서며 ‘이 세상 하얗게 살자는 소망 하나’전한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살고 싶은 화자의 바람을 나타내는 구절이지만, 억새도 그렇게 욕심이 없어 보인다. ‘청아한 은색 물결 온 가슴에 안은 채로/ 갈바람 등에 지고서 운문산을 지키’는 갈대도 아름답게 보인다. 억새는 ‘으악새’라고 불리기도 한다. 유행가에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고 하여 필자도 한때 ‘으악새’가 새의 일종인 줄 알았다.
또한 억새와 갈대는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갈대는 주로 습지 및 냇가, 강가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며, 색은 옅은 갈색이다. 억새는 주로 산에서 살며, 어떠한 땅에서도 억척같이 잘 자란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해안가나 호숫가에는 갈대, 산에는 억새라고 보아야 한다. 갈대와 억새는 모양이 비슷하여 겉으로 봐선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결정적 차이점은 사는 장소이다. 갈대는 물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억새는 산이나 들,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다. 또 갈대는 물가를 떠나서는 자라지 못하고 열매가 조금만 자라도 고개를 숙이는데, 억새는 열매가 자라나도 고개를 쉽게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갈대의 뿌리는 굵고 통통하며 뿌리줄기에 있는 마디를 따라 수염뿌리와 줄기가 다시 올라오기 때문에 뿌리 사이로 잡초들이 자라기도 한다. 억새는 곧고 짧은 뿌리가 촘촘히 얽혀 포기나누기를 하는 것처럼 증식하기 때문에 다른 식물과 함께 자랄 수 없다고 한다.
갈대가 소재가 된 시조도 한 편 소개한다. 새삼 황희 정승 같은 정치가를 그리워하며, 이 시대에도 그런 정치가 한 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울 대로 이운 가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임진강가 갈대들도 제 머리가 무거운지/ 뻣뻣한 고갤 숙이며 옛 생각에 잠깁니다// 너도 옳다, 너도 옳다, 편 가르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우유부단, 손가락질 당했을 법/ 조금 더 높은 곳 바라 끌어안은 맘입니다’ - 「반구정 아래」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