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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며

[권영상 작가님]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며

by 권영상 작가님 2020.12.17

날이 갈수록 기온이 떨어진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다락방에 올라가 지난봄에 떼어놓은 뽁뽁이를 찾아 내려왔다. 창문 여러 곳에 붙인 거니까 떼어낼 때 섞이지 않도록 ‘안방 창문’, ‘거실 창문 왼쪽’, ‘거실 창문 오른쪽’ 하는 식으로 쪽지를 써서 끼워 놓았다.
그걸 붙이는 일은 쉽고 간단하다. 유리 문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고 붙이면 끝이다. 맨 처음 재단할 때가 어렵지, 그 후 나는 몇 년 동안 제 짝을 찾아 붙이기만 했다. 다 붙인 뒤 거실 바닥에 앉는다. 그거 붙였는데도 집안이 한결 아늑한 느낌이다.
고향에서도 초겨울쯤이면 창호문을 바른다. 마당이 좀 한가할 때를 골라 아버지는 방마다 창호문을 떼신다. 한 해 동안 비를 가리고, 햇볕을 받고, 바람을 막아낸 창호문의 창호지는 계절의 얼룩이 배어 누르스름하다. 그런 얼룩진 문으로는 겨울을 날 수 없다. 햇빛 투과율이 턱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낡은 문종이를 물에 적셔 다 떼어내면 부러진 문살을 갈아 끼우거나 잇거나 하는 보수가 필요하다. 헐렁한 돌쩌귀는 갈고, 틀어져 이가 맞지 않는 문틀은 손을 봐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풀칠한 창호지를 아버지와 맞들어 붙인다. 창호지 붙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미덕은 맞드는 일이다. 풀칠한 창호지는 금방 풀을 먹어 잘못 들어 올리면 집어 든 귀퉁이가 찢어지거나 늘어나거나 일그러진다. 질긴 종이라면 잘못 붙여도 떼어내어 다시 붙이면 되지만 창호지는 그게 안 된다.
문 바르기가 끝나면 문을 마루에 비스듬히 걸쳐 놓아 볕에 말린다. 어느 정도 종이가 마르면 아버지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창호문에 후욱 뿌린다. 문종이가 팽팽하게 펴지라고 하는 마지막 작업이다.
한나절 햇볕이면 창호문쯤은 고대 마른다.
손끝으로 마른 창호지를 톡 치면 탱, 하는 가을소리가 난다. 잘 말랐다는 뜻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방방이 문을 달고 벌여놓은 일을 설겆으신다.
이제부터 어린 내가 할 일이 있다. 문 손잡이 근처에 멋을 내는 일이다. 안방 여닫이문엔 주로 은행잎이나 네잎 클로버를 대어 덧바르고, 사랑방 미닫이문엔 사시에 푸른 솔잎이나 측백나무 잎을 대어 덧발랐다. 때론 미농지를 반으로 접어 가위로 문양을 낸 뒤 덧바르기도 했다. 이 모두 시골 사람들이 내는 촌스러운 미적 감각이거나 멋이거나 풍취거나 그랬다. 그러나 거기엔 손잡이 부위가 찢어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도 깃들어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냥 뽁뽁이만 붙여놓고 그 아늑함에 취해있을 일이 아니었다. 은행잎이라도 한 잎 구해 뽁뽁이 안에 붙이고 싶어 뜰로 나갔다. 흔한 게 은행잎이고, 튤립나무 잎이었는데 찾으려고 보니 없다. 집을 나서 괜히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근방을 한 바퀴 돌아 구해 온 것이 사철나무 동그란 잎과 푸른 댓잎이다.
붙여놓은 거실 유리문 뽁뽁이를 떼고 가운데 세로줄, 칸마다 사선으로 댓잎을 한 장씩 넣고 다시 붙인다. 멋지다. 댓잎의 운동감이 살아난다. 안방 창문엔 사철나무 잎을 칸마다 한 장씩 넣는다. 각진 창문에서 친환경적 느낌이 물씬 난다. 더욱 놀란 건 뜰 마당에 나가 창문을 바라볼 때다. 운치 있고 멋스럽다.
올겨울은 이들로 하여금 추워도 덜 춥고 힘들어도 덜 힘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