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눈 내리는 날의 내 안의 풍경
[권영상 작가님] 눈 내리는 날의 내 안의 풍경
by 권영상 작가님 2021.01.21
그날, 나는 운 좋게 그곳에 도착했다.
그건 행운이었다. 어쩌면 새해에 수많은 지인들로부터 받아온 행운의 메시지 덕분이 아닌가 싶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운이 깃드시길!’ 옛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했는데 분명 친구들이 보내준 행운의 울력이 만들어낸 기회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날 점심 무렵, 안성에서 서울로 입성했다. 그것도 8일 만이다. 행운이 내게 막 닥쳐오기 30분 전인 오후 3시. 나는 점심을 먹고 그 산에 올랐다. 그 산에 오르는 건 서울에서 늘 있어온 아침 일상이다. 그러나 그때는 오후 3시 30분. 여느 때와 달랐다.
나는 가벼운 점퍼 차림에 등산화를 신고 내가 가는 코스의 반환점에 올라섰다. 그때였다. 갈수록 하늘이 수상하더니 느닷없이 천둥소리와 함께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탁 보기에도 잠깐 내리다 말 눈이 아니었다. 눈발은 꽃처럼 크고, 위험할 정도로 내리는 속도가 빨랐다. 눈은, 삽 시에 내리는 눈은 내리는 대로 산을 뒤덮어갔다.
이대로 산을 내려가기 싫었다.
나는 번득 그곳을 생각해냈다. 20여 년 전, 한두 번 가보고 내 마음에 묻어놓은, 언젠가는 한번 가보기를 꿈꾸던, 내 마음의 천국 같은, 도착만 한다면 갑갑한 이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식향 같은 그곳이 떠올랐다. 그곳은 도심의 산 중에 이런 풍경이 있나 싶을 만치 인적이 드물고, 깊고, 고적한 은둔에 가까운 곳이다. 설악의 용아장성을 타고 가다 문득 길이 끊겨 방위도 모른 채 그늘진 바위 아래를 지날 때 느끼던 두려움과 두려움 뒤에 오는 편안함.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한번 방위를 잃으면 돌아선다 해도 길을 찾아 돌아나갈 수 없는, 위험하거나 아득하면서도 깊은 곳. 비경이라면 비경이고, 외경이라면 외경인, 바위 밑에서 짐승 한 마리 기어 나와 내게 담배 하나 청한다 해도 그리 두렵지 않은 그런 느낌을 그때 나는 받았다. 그러고는 그 후 나는 다시 그곳에 가지 못했다.
나는 그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섰다. 그곳 역시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눈은 쌓여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모두 순백의 옷을 입고 있었고 늙고 오래된 바위며 가끔 스며드는 바람이며 새들의 울음소리조차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백설 그뿐, 높거나 낮은 것도 없고, 크거나 작은 것도 없고, 밝거나 어두운 것도 없는, 이미 분별을 떠나 있었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다보고 놀랐다. 발자국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은 비틀거리며 걸어온 흔적을, 얼룩진 과거를 미련 없이 지워버리는 곳이었다. 아득히 눈길을 헤치며 몇 번이나 산 구비를 돌고 돌았는지 모를 산길을 걸었다. 그 길 끝에 경마장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암만 가도 나타나지 않았고, 어느 쯤엔가 동학접주의 형상이 얼보이는 바위 벼랑이 있었는데 그것도 없다. 나는 그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다.
세 시간인지, 아니면 네 시간인지도 모를 시간을 산중에서 헤맨 후, 간신히 어디서 본 듯한 정자를 만났다. 내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저쪽에서 눈을 헤치며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시간을 물었다. 6시라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걸어온 그쪽 세상의 문이 쿵, 하고 닫혔고, 사위는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쪽엔 눈이 멈추고 있었다.
내 몰골은 눈 더미에서 빠져나온 짐승을 닮았다. 산능성이엔 보안등이 붉게 켜져 있다. 나는 그 불빛을 밟으며 산길을 내려왔다. 눈 귀신에 홀렸다 풀려나는 것처럼 몸이 홀가분했다.
그건 행운이었다. 어쩌면 새해에 수많은 지인들로부터 받아온 행운의 메시지 덕분이 아닌가 싶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운이 깃드시길!’ 옛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했는데 분명 친구들이 보내준 행운의 울력이 만들어낸 기회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날 점심 무렵, 안성에서 서울로 입성했다. 그것도 8일 만이다. 행운이 내게 막 닥쳐오기 30분 전인 오후 3시. 나는 점심을 먹고 그 산에 올랐다. 그 산에 오르는 건 서울에서 늘 있어온 아침 일상이다. 그러나 그때는 오후 3시 30분. 여느 때와 달랐다.
나는 가벼운 점퍼 차림에 등산화를 신고 내가 가는 코스의 반환점에 올라섰다. 그때였다. 갈수록 하늘이 수상하더니 느닷없이 천둥소리와 함께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탁 보기에도 잠깐 내리다 말 눈이 아니었다. 눈발은 꽃처럼 크고, 위험할 정도로 내리는 속도가 빨랐다. 눈은, 삽 시에 내리는 눈은 내리는 대로 산을 뒤덮어갔다.
이대로 산을 내려가기 싫었다.
나는 번득 그곳을 생각해냈다. 20여 년 전, 한두 번 가보고 내 마음에 묻어놓은, 언젠가는 한번 가보기를 꿈꾸던, 내 마음의 천국 같은, 도착만 한다면 갑갑한 이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식향 같은 그곳이 떠올랐다. 그곳은 도심의 산 중에 이런 풍경이 있나 싶을 만치 인적이 드물고, 깊고, 고적한 은둔에 가까운 곳이다. 설악의 용아장성을 타고 가다 문득 길이 끊겨 방위도 모른 채 그늘진 바위 아래를 지날 때 느끼던 두려움과 두려움 뒤에 오는 편안함.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한번 방위를 잃으면 돌아선다 해도 길을 찾아 돌아나갈 수 없는, 위험하거나 아득하면서도 깊은 곳. 비경이라면 비경이고, 외경이라면 외경인, 바위 밑에서 짐승 한 마리 기어 나와 내게 담배 하나 청한다 해도 그리 두렵지 않은 그런 느낌을 그때 나는 받았다. 그러고는 그 후 나는 다시 그곳에 가지 못했다.
나는 그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섰다. 그곳 역시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눈은 쌓여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모두 순백의 옷을 입고 있었고 늙고 오래된 바위며 가끔 스며드는 바람이며 새들의 울음소리조차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백설 그뿐, 높거나 낮은 것도 없고, 크거나 작은 것도 없고, 밝거나 어두운 것도 없는, 이미 분별을 떠나 있었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다보고 놀랐다. 발자국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은 비틀거리며 걸어온 흔적을, 얼룩진 과거를 미련 없이 지워버리는 곳이었다. 아득히 눈길을 헤치며 몇 번이나 산 구비를 돌고 돌았는지 모를 산길을 걸었다. 그 길 끝에 경마장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암만 가도 나타나지 않았고, 어느 쯤엔가 동학접주의 형상이 얼보이는 바위 벼랑이 있었는데 그것도 없다. 나는 그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다.
세 시간인지, 아니면 네 시간인지도 모를 시간을 산중에서 헤맨 후, 간신히 어디서 본 듯한 정자를 만났다. 내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저쪽에서 눈을 헤치며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시간을 물었다. 6시라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걸어온 그쪽 세상의 문이 쿵, 하고 닫혔고, 사위는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쪽엔 눈이 멈추고 있었다.
내 몰골은 눈 더미에서 빠져나온 짐승을 닮았다. 산능성이엔 보안등이 붉게 켜져 있다. 나는 그 불빛을 밟으며 산길을 내려왔다. 눈 귀신에 홀렸다 풀려나는 것처럼 몸이 홀가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