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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박사님] 미루나무에게

[김민정 박사님] 미루나무에게

by 김민정 박사님 2021.02.22

창밖에 뜨는 꿈 박피 진 얼굴 희다
제 둥지로 받아낸 미셀 뤼노 나무 이야기
뒤집어 잎맥 촉루로 만지작거려 부르는

창밖에 감는 눈 잡힌 바람 연두빛이다
오래된 몸살 풍경을 성큼성큼 드려다 본다
숨어서 키 재기 빗방울 은빛 귀를 탐내며
-노창수, 「미루나무에게」전문

미셀 뤼노는 프랑스 소설가로 『시인을 꿈꾸는 나무』를 써서 생트 뵈브상과 프랑스문인협회 작품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추천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예전 고향에서 자랄 때 먼지 나는 신작로 가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미루나무 잎이 아주 매력적인 모습으로 보이던 때가 있었다. 초여름 하늬바람에 나뭇잎이 자신의 몸을 살랑살랑 흔들던 모습은 어린 눈에 몹시 아름다워 보였다. 이른 봄 잎이 막 돋을 무렵에 우리는 갯버들이나 미루나무 어린 가지들을 꺾어 껍질을 비틀어 줄기가 가는 쪽으로 뽑아내어 그것을 잘라서 풀피리를 만들곤 했다. 정확히 말하면 풀피리라기보다 나무껍질 피리다. 껍질을 뽑아낼 때 틈이 벌어지거나 찢어지면 공기가 새기 때문에 피리를 만들 수 없다.
잎이 돋을 무렵 수피들은 한창 물이 많이 올라 있어 손으로 비틀어도 나무와 수피 사이의 물기 때문에 쉽게 비틀어진다. 흠집 안 나게 수피를 살살 비틀어 나무줄기 가는 쪽으로 뽑으면 상처 없이 잘 뽑힌다. 그것을 입으로 불기 좋게 3cm~5cm 정도로 잘라 풀피리를 만든다. 그리고 입술이 닿는 자리는 다시 겉껍질을 약간 깎아낸 다음 피리를 불면 신기하게도 피리가 불린다. 피리를 부는 기술도 아이들에 따라 달랐고, 잘 불릴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미루나무는 그 외에도 우리들에게는 늘 하나의 친근한 놀이기구였다. 숨바꼭질을 할 때도 미루나무 둥치에 기대어 돌아서서 눈을 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몇 번 외치고 나서 숨을 아이들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날에는 미루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에서 놀기도 하였다. 또 높은 미루나무 꼭대기에 가끔씩 까치가 와서 울면 우리는 좋은 소식의 편지를 기다리며 설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미루나무를 보면, 미루나무라는 말을 들으면 늘 정겨운 느낌이 든다.
지금은 고향에 가도 길을 넓히느라 그 나무들도 다 없어지고, 흙먼지 뽀얗게 날리던 신작로도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되어 옛 정취가 사라진 지 오래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해 가느라 늘 바쁘다. 요즘은 미루나무 길을 보기 힘들고, 대신 은행나무길이 많아졌고, 메타세쿼이아 길이 많아졌다. 이제 미루나무는 나이 든 사람들이 추억하는 오래된 풍경인지도 모른다. ‘창밖에 감는 눈/ 잡힌 바람 연두빛이다/ 오래된 몸살 풍경을/ 성큼성큼 들여다 본다/ 숨어서 키 재기 빗방울/ 은빛 귀를 탐내며’처럼.
벌써 우수가 지났다. 또다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봄은 오고 미루나무에도, 그리고 다른 나무에도 수액이 흐르고, 잎이 피어나고 꽃이 필 것이다. 며칠 전 통도사에서 보고 온 봄의 전령사 홍매(자장매)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내 안에서 향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다. 내 안에는 홍매의 향기가 가득하여 이미 봄이 와 있다. 이 봄에는 미루나무 피리를 불어보고 싶다. 어렸을 그때처럼 직접 만든 피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