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목사님] 나는 사별하였다
[한희철 목사님] 나는 사별하였다
by 한희철 목사님 2021.03.24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라는 말의 무게가 티끌처럼 가벼워진 마당에 새삼 자신이 목사임을 밝히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목사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 삶을 살아갑니다. 교우들의 삶에 찾아오는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나눕니다. 기쁨의 순간엔 축하를, 슬픔의 순간엔 위로를 나누게 되지요.
그중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장례입니다. 교우가 돌아가실 때도 있고, 교우의 가족이 돌아가실 때도 있습니다. 장례 중에는 흔히 호상이라 부르는 장례가 있어 함께 했던 시간을 감사로 돌아보게 되기도 하지만, 마음 아픈 죽음도 아주 없지는 않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운 장례도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나는 사별하였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별을 경험한 분들이 적은 글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사별자’라는 말이나 ‘비사별자’ ‘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은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온도가 식어버린 말 같기도 했고, 나와 상관이 없다는 듯 거리를 두게 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뒤에야 항복하듯이 인정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이별 중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 사별이라는 것,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 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은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겪는 수많은 아픔 중에서도 근원적인 아픔이라는 것 등입니다.
적잖은 장례식에 참여하여 슬픔을 위로하며 지내왔다 싶었던 내게 <나는 사별하였다>에 실린 글들은 묵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슬픔을 당한 이의 아픔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의 일부만을 헤아렸다는, 너무 쉽게 교리에 기댔다는 자책이 일었습니다.
뼛속 깊이 울어야 하는 마음의 몸살을, 하나님께 독기 든 언어로 대드는, 창자까지 꼬이는, 더듬이를 잃어버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슬픔에 절망하는 나와 그런 나를 망연히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를, 하루씩만 살아가기로 겨우 다짐하는 심정을, 지붕이 사라진 추운 집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머무는 시린 느낌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자신도 모르게 겪어야 하는 대인기피증과 혼자서는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는 안쓰러운 결정 장애를, 익숙했던 일이 갈수록 서툴러지는 퇴화 현상을, 버리면서 지우기와 품으면서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때마다 마주해야 하는 허전함과 당혹감을, 여행이나 일이나 쇼핑이나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것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근원적인 공허함을, 나는 충분히 모르고 있거나 시간이 지났다고 이제쯤엔 가벼워졌겠지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것은 언 손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에게 나의 언 손을 내밀 수 있기를, 함께 산다는 것의 소중함을 새롭게 새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중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장례입니다. 교우가 돌아가실 때도 있고, 교우의 가족이 돌아가실 때도 있습니다. 장례 중에는 흔히 호상이라 부르는 장례가 있어 함께 했던 시간을 감사로 돌아보게 되기도 하지만, 마음 아픈 죽음도 아주 없지는 않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운 장례도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나는 사별하였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별을 경험한 분들이 적은 글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사별자’라는 말이나 ‘비사별자’ ‘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은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온도가 식어버린 말 같기도 했고, 나와 상관이 없다는 듯 거리를 두게 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뒤에야 항복하듯이 인정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이별 중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 사별이라는 것,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 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은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겪는 수많은 아픔 중에서도 근원적인 아픔이라는 것 등입니다.
적잖은 장례식에 참여하여 슬픔을 위로하며 지내왔다 싶었던 내게 <나는 사별하였다>에 실린 글들은 묵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슬픔을 당한 이의 아픔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의 일부만을 헤아렸다는, 너무 쉽게 교리에 기댔다는 자책이 일었습니다.
뼛속 깊이 울어야 하는 마음의 몸살을, 하나님께 독기 든 언어로 대드는, 창자까지 꼬이는, 더듬이를 잃어버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슬픔에 절망하는 나와 그런 나를 망연히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를, 하루씩만 살아가기로 겨우 다짐하는 심정을, 지붕이 사라진 추운 집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머무는 시린 느낌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자신도 모르게 겪어야 하는 대인기피증과 혼자서는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는 안쓰러운 결정 장애를, 익숙했던 일이 갈수록 서툴러지는 퇴화 현상을, 버리면서 지우기와 품으면서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때마다 마주해야 하는 허전함과 당혹감을, 여행이나 일이나 쇼핑이나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것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근원적인 공허함을, 나는 충분히 모르고 있거나 시간이 지났다고 이제쯤엔 가벼워졌겠지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것은 언 손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에게 나의 언 손을 내밀 수 있기를, 함께 산다는 것의 소중함을 새롭게 새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