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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주량과 절제

[이규섭 시인님] 주량과 절제

by 이규섭 시인님 2021.04.16

언론인이자 시인이며 영문학자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ㆍ1897~1961)는 술꾼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쓴 수필집 ‘명정 40년(酩酊四十年)’은 술 마시고 벌인 추태와 실수가 흥건하게 담겼다. ‘명정’이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상태를 뜻한다. ‘오투타가’(誤投他家ㆍ술이 취해 남의 집에 잘 못 들어감) 실수가 여러 번이고 ‘취와노상’(醉臥路上ㆍ술 취해 길에서 잠이 듬) 추태도 많았다. 술을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는 성미였고, 말 술, 주신(酒神), 주호(酒壺), 국보급 주객(酒客)으로 불리었다.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재직 시절, 공초 오상순, 성재 이관구, 횡보 염상섭이 찾아오자 성대 뒷산 사발정 약수터에서 술을 마셨다. 만취 상태에 비가 와 옷이 젖자 공초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며 옷을 벗어 찢었다. 네 사람 모두 의기투합, 일사불착(一絲不着ㆍ실오라기 하나 없음) 상태로 부근에 있던 소를 타고 캠퍼스를 거쳐 동네로 내려오다 경찰에 연행된 일화는 유명하다.
수주 변영로에는 못 미치지만 언론인 J 씨의 주량도 녹록지 않다. 해직기자에서 짜장면 집 주인을 거쳐 작가로 활동하며 다시 언론인으로 복귀했던 그의 주력(酒歷)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내가 취재한 ‘별난 사람’이다. 그는 사회부 기자 시절, 술 좋아하는 동료와 ‘누가 더 센가’ 내기를 했다. 술집을 한 집씩 차례로 들러 무슨 술이든 딱 한 잔씩 마셔 누가 먼저 떨어지냐는 겨루기다. 상대방을 녹다운 시킨 뒤 호기를 부리며 귀가 택시를 타려다 “내가 먼저 잡았다”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사람과 어울려 또 술을 마셨다는 호주가다. 술에 장사 없다고 몇 년 전 칠십 대 중반에 타계했다.
최근 ‘언론 회보’에 언론인 선배가 기고한 술의 건강학에 따르면 술은 ‘J자(字)’의 끝부분처럼 ‘조금, 적정량’을 마시면 몸에 이롭지만 그 선을 넘으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J 커브’는 1981년 영국의 마멋(Michael Marmot) 의학박사가 처음 발표했다. 그 후 1993년 미국 보건과학협의회에서 검증하여 ‘적정량의 음주는 사망률을 떨어트리고, 건강에 플러스가 된다’는 결론을 내놓아 ‘J 커브’가 공인됐다. 이에 근거하여 일본의 의사들은 저마다 ‘J 커브, J 커브’ 하며 인용하고 있다.
‘갑자기 술을 끊으면 오히려 빨리 죽는다’는 제목의 책을 써 화제를 모은 구라찌 미유끼(倉知美幸) 의학박사는 ‘술의 적정량을 사께(日本酒) 1홉(合 180ml), 와인 4분의 1병(180ml), 소주 0.6홉(110ml), 위스키 더블 1잔(60ml)’이라고 했다. 일본의 알코올 건강의학협회는 그 두 배까지는 괜찮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올해 80대 중반인 선배는 매일 술을 즐기는 애주가다. 현재의 주량은 와인 한 병. “즐겁게 마시는 술은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최상의 보상”이라고 강조한다. 같은 양의 술이라도 마시는 상대와 분위기에 따라 차이가 난다.
술 마신 다음 날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양이 적정량이 아닌가 싶다. 술 마신 다음 날 숙취로 속이 쓰리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면 과음한 것이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적당한 절제 또한 삶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