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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박사님] 호미곶 등대

[김민정 박사님] 호미곶 등대

by 김민정 박사님 2021.05.17

구름 위로 치켜떴나 저 하얀 로켓의 눈
내 삶의 이정표를 바닷물에 그어놓자
십일월 늦은 가을날 하늘도 내려온다

그 하늘 잠겨들까 중력으로 떠받친 날
지상의 나무들은 단풍으로 활활 탄다
얼마쯤 굴절되면서 멀리멀리 가는 물빛,

세상은 뉘도 몰래 앞뒤가 뒤바뀌고
그때를 놓지 않고 숨죽이는 태풍의 눈
바람을 잠재우느라 잠 못 드는 저 불빛,
- 졸시, 「호미곶 등대」 전문

한반도의 최동단,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포항 호미곶 등대를 찾은 날은 늦가을이었다. 호미곶 광장 앞바다에는 ‘상생의 손’이라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친 모습의 조각품이 우뚝 솟아 있어, 그곳을 사진 찍으려 했을 때 때마침 날아와 다섯 손가락에 모두 앉아 있는 갈매기 모습을 운 좋게 찍을 수 있었다. <상생의 손>은 이렇게 바닷새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배가 드나드는 어귀를 뜻하는 포구, 포항시의 영일만은 형산강의 마지막 물줄기가 이곳으로 흘러나와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포스코의 용광로가 밤을 환하게 밝히며 철강 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겨울철 북태평양에서 잡은 꽁치를 얼렸다가 녹이기를 반복하면서 만든 과메기가 명물이다. 본격적인 과메기 철이 되면 죽도 시장과 구룡포를 비롯한 해안에는 과메기를 말리는 덕장으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꽁치가 해풍을 맞으며 건조되면 투명한 적갈색 빛깔이 감돌며 고소하고 쫄깃한 겨울철 별미가 된다.
호미곶 등대 옆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등대는 바닷가나 섬 같은 곳에 탑 모양으로 높이 세워 깜깜한 밤에도 배가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는 항로표지이다. 해상 교통의 안전 지킴이로 꼭 필요한 등대는 적막한 바다를 배경으로 홀로 고요히 서 있는 경우가 많다. 흰색의 호미곶 등대를 보는 순간 ‘등대지기’라는 노래가 생각나기도 했다.
1985년에 설립된 국립등대박물관 안에는 세계 여러 곳의 유명한 등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것이 세워진 연도를 기록한 모습도 인상적이었으며 등대의 여러 모습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등대를 보니 갑자기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후략>’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삶의 순간순간 참 많이 이 구절을 떠올렸고, 위안을 받았었다. 그런 순간이면 시의 효용을 깊이 생각했었다.
등대란 얼마나 아름답고 희망적인 단어인가. 어둔 밤바다를 헤쳐 갈 때, 또 예기치 못한 폭풍우를 만났을 때 멀리서 비쳐오는 등대의 불빛으로 목적지인 항구를 안전하게 찾아갈 수 있으니. 누군가에서 희망이 되는 등대 같은 삶이기를, 또 등대 같은 시를 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