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작가님] 너는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권영상 작가님] 너는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by 권영상 작가님 2021.06.17
세상엔 기다리지 않고 되는 일이란 없다. 모두, 시간을 빌어 생겨나고 소멸되기 때문이다. 샘에서 물 한 병을 받으려 해도 물 한 병 크기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배를 타고 섬을 벗어나려 해도 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
세상 이치가 그런 줄 알면서도 가끔은 기다림의 시간에 짓눌려 본심을 잃거나 체통을 버릴 때가 있다. 텃밭에 작물을 심어놓고 기다릴 때도 그렇다. 봄이 기습적으로 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마구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감자 밭에 감자씨를 넣고 20여 일을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마는 심어놓고 무려 55일을 기다려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들판이 초록으로 변할 때에 55일의 기다림이란 솔직히 고통이다.
그보다 더한 기다림을 요구하는 것도 있다. 칸나다.
3월 31일. 꽃씨와 상추씨를 뿌리고, 감자와 토란을 심고, 양재동 꽃시장에서 구한 칸나 두 뿌리를 심었다. 3년 전 칸나를 심어 그 여유로운 초록 잎의 멋에 반했는데 갈무리를 못해 그만 종자를 잃고 말았다. 올해는 어떻든지 칸나의 멋을 되찾고 싶었다.
심을 때만 해도 칸나 뿌리는 붉고 건강했다. 움도 불룩하니 나와 있었다. 그러나 감자가 나오고, 토란이 나와도 칸나 심은 자리는 고요했다. 그 사이 모란이 피고 지고, 함박꽃이 피고 지고, 장미꽃이 담장을 넘나들며 피는데도 기척 없던 것이 65일을 넘기고 나서야 소리 없이 올라왔다. 기다림의 인내가 아주 바닥이 날 때쯤이었다.
기다림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한이 숨어 있다. 정한이란 원망의 정서다. 하도 기다린 터라 칸나가 나와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나는 며칠간 본 척만척했다. 분명히 알뿌리가 튼실한 놈을 심었는데 어딜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는지.
나를 안달하게 하는 녀석이라면 그 말고 또 있다. 생강이다.
생강은 기다림 그 자체가 스트레스다. 4월 9일에 서른한 쪽을 심었다. 그리고 65일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심은 자리에 올라온 풀만도 여러 차례 뽑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 무심한 생강에 노여움을 보이다가, 한탄의 한숨을 내쉬다가, 그의 게으름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제는 매실이 익고, 딸기가 익고, 뜰보리수 열매가 익고 있는데 생강은 어쩌라는 건지 통 대답이 없다. 나는 몇 번이고 그들 때문에 성화를 냈다.
참다못해 결국 호미를 세워들고 이랑을 헤쳤다. 호밋날에 생강 편이 몇 쪽 걸려 나왔다. 여지껏 어금니처럼 흰 움만 물고 앉아 있다. 그게 흙 밖으로 나오려면 여태 기다려온 날들을 빼고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지금은 유월이다. 여름이 코앞인데도 저러고 있는 생강이 밉살스럽다.
저녁에 혹시나 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문제는 생강이 아니고 나였다. 나는 너무도 생강을 모르고 있었다. 알뿌리 식물이라고 토란이나 생강이나 다 같은 줄로만 알았다. 생강은 원산지가 인도며 재배지가 열대 아시아다. 그러니 생강은 지금 고온이 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것도 모른 채 둔감하니, 무심하니, 게으르니, 하며 생강을 탓했다. 남들은 모두 세상에 나와 벌써 열매 맺고 있는데 대체 흙 속에서 뭐 하는 거냐며 빈정거렸다.
나는 조곤조곤 남을 이해하는 힘이 내가 생각하기도 좀 약하다. 내 급한 성미대로 토란이며 칸나, 생강을 쉽게 한 통속으로 몰아 성부터 낸다. 저마다 성질이 다름을 미처 보지 못한다. 생강 앞에서 바장대고 성질부리는 나를 생강은 뭐라 했을까.
넌 정말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그러며 울지는 않았을까.
세상 이치가 그런 줄 알면서도 가끔은 기다림의 시간에 짓눌려 본심을 잃거나 체통을 버릴 때가 있다. 텃밭에 작물을 심어놓고 기다릴 때도 그렇다. 봄이 기습적으로 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마구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감자 밭에 감자씨를 넣고 20여 일을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마는 심어놓고 무려 55일을 기다려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들판이 초록으로 변할 때에 55일의 기다림이란 솔직히 고통이다.
그보다 더한 기다림을 요구하는 것도 있다. 칸나다.
3월 31일. 꽃씨와 상추씨를 뿌리고, 감자와 토란을 심고, 양재동 꽃시장에서 구한 칸나 두 뿌리를 심었다. 3년 전 칸나를 심어 그 여유로운 초록 잎의 멋에 반했는데 갈무리를 못해 그만 종자를 잃고 말았다. 올해는 어떻든지 칸나의 멋을 되찾고 싶었다.
심을 때만 해도 칸나 뿌리는 붉고 건강했다. 움도 불룩하니 나와 있었다. 그러나 감자가 나오고, 토란이 나와도 칸나 심은 자리는 고요했다. 그 사이 모란이 피고 지고, 함박꽃이 피고 지고, 장미꽃이 담장을 넘나들며 피는데도 기척 없던 것이 65일을 넘기고 나서야 소리 없이 올라왔다. 기다림의 인내가 아주 바닥이 날 때쯤이었다.
기다림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한이 숨어 있다. 정한이란 원망의 정서다. 하도 기다린 터라 칸나가 나와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나는 며칠간 본 척만척했다. 분명히 알뿌리가 튼실한 놈을 심었는데 어딜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는지.
나를 안달하게 하는 녀석이라면 그 말고 또 있다. 생강이다.
생강은 기다림 그 자체가 스트레스다. 4월 9일에 서른한 쪽을 심었다. 그리고 65일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심은 자리에 올라온 풀만도 여러 차례 뽑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 무심한 생강에 노여움을 보이다가, 한탄의 한숨을 내쉬다가, 그의 게으름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제는 매실이 익고, 딸기가 익고, 뜰보리수 열매가 익고 있는데 생강은 어쩌라는 건지 통 대답이 없다. 나는 몇 번이고 그들 때문에 성화를 냈다.
참다못해 결국 호미를 세워들고 이랑을 헤쳤다. 호밋날에 생강 편이 몇 쪽 걸려 나왔다. 여지껏 어금니처럼 흰 움만 물고 앉아 있다. 그게 흙 밖으로 나오려면 여태 기다려온 날들을 빼고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지금은 유월이다. 여름이 코앞인데도 저러고 있는 생강이 밉살스럽다.
저녁에 혹시나 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문제는 생강이 아니고 나였다. 나는 너무도 생강을 모르고 있었다. 알뿌리 식물이라고 토란이나 생강이나 다 같은 줄로만 알았다. 생강은 원산지가 인도며 재배지가 열대 아시아다. 그러니 생강은 지금 고온이 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것도 모른 채 둔감하니, 무심하니, 게으르니, 하며 생강을 탓했다. 남들은 모두 세상에 나와 벌써 열매 맺고 있는데 대체 흙 속에서 뭐 하는 거냐며 빈정거렸다.
나는 조곤조곤 남을 이해하는 힘이 내가 생각하기도 좀 약하다. 내 급한 성미대로 토란이며 칸나, 생강을 쉽게 한 통속으로 몰아 성부터 낸다. 저마다 성질이 다름을 미처 보지 못한다. 생강 앞에서 바장대고 성질부리는 나를 생강은 뭐라 했을까.
넌 정말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그러며 울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