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다른 존재, 다른 소리
[김재은 대표님] 다른 존재, 다른 소리
by 김재은 대표님 2021.07.13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가끔 TV 토론을 보다 보면 정말이지 같은 사안을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로를 답답해하면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기까지 한다. 보는 사람들도 편들기를 하면서 함께 흥분한다. 익숙한 우리네 삶의 풍경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을 잊고 살기 쉽다. 당연히 나랑 비슷하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하면서 자기 나름의 틀 속에 상대를 가두어 버린다. 이러다 상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틀렸다는 확신’에 차서 비난과 욕설이 난무한다. 사실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되기 쉽지 않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라 듣고 말하고 보이는 주파수가 다르다고. 우리가 새소리는 들어도 새는 우리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듣기의 주파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존재끼리 주파수가 같다고 착각하고 우기면 안 된다. 거기에는 내 생각이나 판단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대로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가진 존재일 뿐이다. 시비와 갈등의 삶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조금은 편안한 삶과 자유가 내 것이 된다.
인간의 귀는 생각보다 훨씬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과 다른 소리를 듣는데 인색하다. 그러다 보니 그것은 그대로 그 사람의 한계가 되어버린다. 인간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다. 때로는 자연의 소리에, 세상의 소리에 그리고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소리에 귀를 내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좋아하고 찬탄한다. 새들은 저마다의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서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새들 사이에는 지역에 따른 억양의 차이도 존재한다. 특히 솔잣새, 푸른머리되새와 같은 참샛과 새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도 그러하다. 우리의 귀는 거리의 카페나 기차 안에서 나와 같은 곳의 억양도 다른 억양도 즉시 감지해낸다. 그중 어떤 건 듣기에 좋고 호감이 가고 기분 좋은 웃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듣기 싫은 억양도 있다.
이런 게 우리네 삶이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그 속에서 감정의 부딪힘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원래 다르게 태어난 데다가 다른 환경에서 다른 교육까지 받았으니 확실히 ‘다른 존재’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다른 소리가 나오는 것일 테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의 귀앓이로 이제 한 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불편하긴 하지만 큰 장애라고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두 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 때로는 더 ‘경청’을 잘 하는 행복디자이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잘 안 들리는 한 쪽 귀를 소음이 들려오는 귀라 여기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시비도 많고 갈등도 많은 세상살이이다.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보다는 나만이, 우리만이 옳다며 언성을 높이고 비난이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세상의 소리에 모두 관심을 가지거나 반응할 필요는 없다. 주파수가 다른 것이라 여기며 그냥 넘기면 된다.
주파수가 다른데 같은 소리가 나온다면 더 이상할 테니까. 지금은 주파수가 다른 소리는 차치하고 주파수가 같은 사람들 끼리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소통할 때이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며 진심 어린 반응과 공감, 관심을 보일 때 삶은 훨씬 편안하고 즐거워질 것이다. 억지로 어찌하려 애쓰지 말고 때론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을 잊고 살기 쉽다. 당연히 나랑 비슷하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하면서 자기 나름의 틀 속에 상대를 가두어 버린다. 이러다 상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틀렸다는 확신’에 차서 비난과 욕설이 난무한다. 사실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되기 쉽지 않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라 듣고 말하고 보이는 주파수가 다르다고. 우리가 새소리는 들어도 새는 우리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듣기의 주파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존재끼리 주파수가 같다고 착각하고 우기면 안 된다. 거기에는 내 생각이나 판단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대로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가진 존재일 뿐이다. 시비와 갈등의 삶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조금은 편안한 삶과 자유가 내 것이 된다.
인간의 귀는 생각보다 훨씬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과 다른 소리를 듣는데 인색하다. 그러다 보니 그것은 그대로 그 사람의 한계가 되어버린다. 인간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다. 때로는 자연의 소리에, 세상의 소리에 그리고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소리에 귀를 내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좋아하고 찬탄한다. 새들은 저마다의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서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새들 사이에는 지역에 따른 억양의 차이도 존재한다. 특히 솔잣새, 푸른머리되새와 같은 참샛과 새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도 그러하다. 우리의 귀는 거리의 카페나 기차 안에서 나와 같은 곳의 억양도 다른 억양도 즉시 감지해낸다. 그중 어떤 건 듣기에 좋고 호감이 가고 기분 좋은 웃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듣기 싫은 억양도 있다.
이런 게 우리네 삶이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그 속에서 감정의 부딪힘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원래 다르게 태어난 데다가 다른 환경에서 다른 교육까지 받았으니 확실히 ‘다른 존재’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다른 소리가 나오는 것일 테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의 귀앓이로 이제 한 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불편하긴 하지만 큰 장애라고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두 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 때로는 더 ‘경청’을 잘 하는 행복디자이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잘 안 들리는 한 쪽 귀를 소음이 들려오는 귀라 여기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시비도 많고 갈등도 많은 세상살이이다.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보다는 나만이, 우리만이 옳다며 언성을 높이고 비난이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세상의 소리에 모두 관심을 가지거나 반응할 필요는 없다. 주파수가 다른 것이라 여기며 그냥 넘기면 된다.
주파수가 다른데 같은 소리가 나온다면 더 이상할 테니까. 지금은 주파수가 다른 소리는 차치하고 주파수가 같은 사람들 끼리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소통할 때이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며 진심 어린 반응과 공감, 관심을 보일 때 삶은 훨씬 편안하고 즐거워질 것이다. 억지로 어찌하려 애쓰지 말고 때론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