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대표님] 인생해찰
[김재은 대표님] 인생해찰
by 김재은 대표님 2021.07.27
아... 어찌어찌하다 보니 예순이 코앞이다. 이런 날이 올지 정말 몰랐다. 20대에는 20대가, 30대에는 30대가 계속되는 줄 알았는데 끝내 이순이라는 60을 맞이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문득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떠오른다. 우리에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죽음)이 생길 줄 내가 알았지!’
언젠가 분명 나도 버나드 쇼처럼 이런 넋두리 같은 묘비명을 새겨야 할지 모를 일이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평소의 삶과는 달리 작은 조바심이 스멀스멀 등 뒤로 기어오른다. 지난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뇌리에 망설임 없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진짜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생소한 말일 수도 있겠다. ‘중간치기’였다. 주로 "땡땡이(를) 치다"는 표현으로 사용되는데 수업에 빠지고 집과 학교 중간 어디쯤에서 노는 것을 뜻한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중간치기 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는데 주로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먼 친구들이었다. 아프거나 일이 있어 결석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에는 오지 않고 중간에서 놀았다는 게 드러나 선생님한테 혼쭐이 나곤 했다.
그런데 난 그런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난 엄두도 못 낼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기준이나 규범에 얽매여 꼼짝 못 하며 살아가던 시절에 걔들은 두려움 없이 보란 듯이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나저나 그 시절이 다시 온다면 지금에라도 난 그 중간 치기를 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진짜 삶일듯한데 60이 되도록 뭘 하며 살아왔는지. 순간 떠오른 단어가 있다. 해찰이다.
사전에는 ‘마음에 썩 내키지 아니하여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아... ‘쓸데없이 다른 짓’이라고? 공부에 관심이 없으니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었을 것이고 기꺼이 중간치기를 해낸 것이렷다. 그런데 돌아보니 작은 일탈이라 할 수 있는 해찰을 일찍 경험한 친구들은 커서는 해찰 대신 집중을 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간치기와 해찰에 ‘해찰하다’ 보니 말이말이 엉뚱한 데로 빠져버렸다. 어쨌든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이 해찰인 것 같다. 앞만 보며 달려 나온 삶에 쉼표(,)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정해진 틀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지루하고 반복된 삶이 지금까지의 삶이었다면 이젠 구속의 줄을 끊고 자유를 찾아 황야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에 호기심을 불어넣어 이곳저곳 기웃거려보는 ‘인생해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해야 다른 삶, 새롭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오랜 시간 동안 가둬놓은 생각이나 삶에 바람도 쐬고 볕도 쪼여줘야, 내 것만이 최고인 양 살아가는 꼰대적 삶이 새로운 꽃이 예쁘게 피어나는 꽃대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파격과 궤도 이탈을 두려워말고 타성과 관성의 삶에서 벗어나 해찰의 세상에 발을 디뎌보자. 멍때리기도 해 보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그냥 그대로를 느껴보자.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한국의 버나드 쇼가 되지 말고, 지금 당장 해찰에 빠져보자. 어디론가 떠나보기도 하고, 해보고 싶은 것도 주저 없이 해보면 좋겠다. 내일로의 유예는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선언이니까. 그나저나 중학교 때 수업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며 해찰을 하는 나에게 분필을 집어던졌던 그 국사 선생님은 잘 계시려나?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죽음)이 생길 줄 내가 알았지!’
언젠가 분명 나도 버나드 쇼처럼 이런 넋두리 같은 묘비명을 새겨야 할지 모를 일이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평소의 삶과는 달리 작은 조바심이 스멀스멀 등 뒤로 기어오른다. 지난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뇌리에 망설임 없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진짜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생소한 말일 수도 있겠다. ‘중간치기’였다. 주로 "땡땡이(를) 치다"는 표현으로 사용되는데 수업에 빠지고 집과 학교 중간 어디쯤에서 노는 것을 뜻한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중간치기 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는데 주로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먼 친구들이었다. 아프거나 일이 있어 결석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에는 오지 않고 중간에서 놀았다는 게 드러나 선생님한테 혼쭐이 나곤 했다.
그런데 난 그런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난 엄두도 못 낼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기준이나 규범에 얽매여 꼼짝 못 하며 살아가던 시절에 걔들은 두려움 없이 보란 듯이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나저나 그 시절이 다시 온다면 지금에라도 난 그 중간 치기를 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진짜 삶일듯한데 60이 되도록 뭘 하며 살아왔는지. 순간 떠오른 단어가 있다. 해찰이다.
사전에는 ‘마음에 썩 내키지 아니하여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아... ‘쓸데없이 다른 짓’이라고? 공부에 관심이 없으니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었을 것이고 기꺼이 중간치기를 해낸 것이렷다. 그런데 돌아보니 작은 일탈이라 할 수 있는 해찰을 일찍 경험한 친구들은 커서는 해찰 대신 집중을 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간치기와 해찰에 ‘해찰하다’ 보니 말이말이 엉뚱한 데로 빠져버렸다. 어쨌든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이 해찰인 것 같다. 앞만 보며 달려 나온 삶에 쉼표(,)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정해진 틀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지루하고 반복된 삶이 지금까지의 삶이었다면 이젠 구속의 줄을 끊고 자유를 찾아 황야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에 호기심을 불어넣어 이곳저곳 기웃거려보는 ‘인생해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해야 다른 삶, 새롭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오랜 시간 동안 가둬놓은 생각이나 삶에 바람도 쐬고 볕도 쪼여줘야, 내 것만이 최고인 양 살아가는 꼰대적 삶이 새로운 꽃이 예쁘게 피어나는 꽃대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파격과 궤도 이탈을 두려워말고 타성과 관성의 삶에서 벗어나 해찰의 세상에 발을 디뎌보자. 멍때리기도 해 보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그냥 그대로를 느껴보자.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한국의 버나드 쇼가 되지 말고, 지금 당장 해찰에 빠져보자. 어디론가 떠나보기도 하고, 해보고 싶은 것도 주저 없이 해보면 좋겠다. 내일로의 유예는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선언이니까. 그나저나 중학교 때 수업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며 해찰을 하는 나에게 분필을 집어던졌던 그 국사 선생님은 잘 계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