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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무씨를 넣다

[권영상 작가님] 무씨를 넣다

by 권영상 작가님 2021.08.19

8월 15일이면 무씨를 넣을 때다.
그건 오래전, 아버지 어깨너머로 익힌 날짜다. 무씨는 더위가 절정에 이를 때 땅에 들어가 점차 식어가는 대지에 적응한다. 여느 씨앗과 달리 배추나 무 씨앗은 그렇다. 서리나 저온에 처할수록 오히려 맹렬히 자란다.
올해는 봄부터 무씨 넣을 때를 별렀다.
그건 밑거름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가 늘 고민이었다. 그거야 봉지에 담아 음식물 쓰레기함에 넣으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그렇겠지만 그 이후의 일을 내가 손수 마무리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유기농 퇴비 만들기를 공부한 뒤 나름대로 안성 뜰보리수나무 밑에 풀거름더미를 하나 마련했다. 우선 맨 밑바닥에 뜰 안에 지천인 풀을 베어 충분한 두께로 깐다. 그 위에 집에서 가져간 음식물 쓰레기를 골고루 펴듯이 한 겹 얹는다. 이들을 잘 발효시키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약간의 살아있는 흙을 섞어주는 일. 그리고 쌀뜨물이나 한잔 마신 셈 치고 산 막걸리를 끼얹어 주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감싸듯 풀로 폭 덮어준 뒤, 가끔가끔 물을 뿌려 건조해지는 걸 막는다.
일주일이나 열흘 뒤, 다시 집에서 모아간 음식물 쓰레기를 넣을 때면 만들어둔 퇴비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확인은 뜻밖에 쉽다. 퇴비의 발효를 도와주는 생명체가 있다. 바로 지렁이다. 부르지 않아도 지렁이는 찾아와 퇴비 더미 속을 들쑤시며 다닌다. 좀 징그럽기는 해도 그들이 거기 살고 있는 한 퇴비는 건강하다.
그렇게 만든 퇴비를 충분히 밭에 내고 무씨 넣을 일을 생각하니 내가 제법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 같아 뿌듯하다. 시중에서 파는 이름만 유기농 퇴비인 거름을 몇 포대씩 사다가 뿌려보면 느끼는 게 있다. 이들이 밭을 기름지게 하기보다 오히려 밭을 점점 푸석거리게 만든다는 거다. 뒷거름이나 외양간 거름을 내면 밭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고 걸어져 곡물이 기갈을 느끼지 않고 잘 자란다. 그러나 요즘 시중에 나오는 유기농 퇴비는 밭을 건조화시켜 조금만 가물어도 곡식이 큰 해를 입는다.
아침에 이드거니 밥을 먹고 텃밭에 나갔다.
뜰보리수나무 밑의 퇴비 자리를 헤쳐본다. 슬쩍 올라오는 퇴비 냄새가 풋풋한 게 싫지 않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붉고 살찐 지렁이들이 서둘러 몸을 숨긴다. 쇠스랑으로 거름을 파내어 밭에 낸다. 마치 예전, 아버지가 두엄을 내시던 그때의 기분이다.
빈 밭에 퇴비를 잘 펴고 삽을 들어 밭을 뒤집는다. 무씨 반봉지도 다 넣을까 말까 한 손뼉만 한 조각 밭이다. 땅속 깊숙이 꾹꾹 삽을 찔러 넣어 퇴비와 흙을 섞는다. 비록 소소한 분량이지만 잠시 환경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두둑을 타고 앉아 무씨를 넣는다.
무씨를 집어 드는 내 손이 올해만큼 대견할 수 없다. 손길이 지날 때마다 흙에서 올라오는 구수한 거름 냄새가 좋다. 씨를 다 넣고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도닥도닥 두둑을 두드린다. 그것도 부족해 풀 깎은 것 중에 연한 풀을 두둑 위에 피복 삼아 쪽 덮어준다. 서울로 돌아가면 일주일쯤에나 다시 내려올 때를 대비해서다.
저녁이면 창밖에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가깝다는 신호다. 차가운 달빛을 또 몇 번이나 맞으면 무순은 무성히 자라 오를 테고, 땅속에선 희멀겋게 무가 살찔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