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목사님] 굴뚝 연기와 댓돌 위 신발
[한희철 목사님] 굴뚝 연기와 댓돌 위 신발
by 한희철 목사님 2021.09.01
‘고독사’라는 말은 참 어둡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쓸쓸함과 외로움을 담고 있는 ‘고독’(孤獨)이라는 말에 죽음을 뜻하는 ‘사’(死)가 합해졌으니, 더욱 쓸쓸할 수밖에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움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사라질 것은 모두 사라지고 사라지기에는 아직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만 남은, 검불 같은 메마름으로 다가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문이 잠겨 있어 강제로 문을 뜯고 열어보니 뼈만 남은 백골 상태, 이상한 냄새가 역겨워 진원지를 찾고 보니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 우편함에 잔뜩 우편물이 쌓여 있어 확인해 보니 언제 숨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태, 마지막 식사였지 싶은 상엔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있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홀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고독사라 부릅니다.
세월이 지나가며 새롭게 생겨나는 말들이 있습니다. 신조어들은 그 말이 만들어지는 시대상을 담고 있습니다. 고독사라는 말에도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이 담겨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입니다. 아파트가 늘면서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이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는 사람 사이를 오가는 왕래의 발길을 더욱 끊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이 세상 살아오며 누군가와 맺은 소중한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부득이한 사고가 아니라면 누군가를 이 땅에서 홀로 떠나보낸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일 수 없습니다. 잘 가시라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각자 외딴 섬처럼 고립된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오래전 농촌에서 지낼 때가 떠오릅니다. 때가 되었는데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서로 살폈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진 건 아닐까, 땔감이 없는 것은 아닐까, 혹시 아파서 누워있는 것은 아닐까를 살폈지요. 굴뚝의 연기만 보고도 서로의 안부를 헤아리며 지냈습니다.
댓돌 위의 신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발이 너무 오래 안 보이면 밭에서 쓰러진 건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고, 신발이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그대로면 그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일부러라도 들러 안부를 살피고는 했습니다.
이제는 고독사가 드문 일도 아니어서, 우리나라에서 고독사로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이 하루 평균 11명이라고 합니다. 이 땅 어디선가 하루 11명의 누군가가 아무도 모르는 고독한 죽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고독사를 막기 위해 굴뚝의 연기를 살피고 댓돌 위의 신발을 살피는 일은 도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럴수록 관심의 사각지대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금 고독사를 막아내지 못하면 결국 우리 또한 고독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문이 잠겨 있어 강제로 문을 뜯고 열어보니 뼈만 남은 백골 상태, 이상한 냄새가 역겨워 진원지를 찾고 보니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 우편함에 잔뜩 우편물이 쌓여 있어 확인해 보니 언제 숨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태, 마지막 식사였지 싶은 상엔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있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홀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고독사라 부릅니다.
세월이 지나가며 새롭게 생겨나는 말들이 있습니다. 신조어들은 그 말이 만들어지는 시대상을 담고 있습니다. 고독사라는 말에도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이 담겨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입니다. 아파트가 늘면서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이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는 사람 사이를 오가는 왕래의 발길을 더욱 끊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이 세상 살아오며 누군가와 맺은 소중한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부득이한 사고가 아니라면 누군가를 이 땅에서 홀로 떠나보낸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일 수 없습니다. 잘 가시라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각자 외딴 섬처럼 고립된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오래전 농촌에서 지낼 때가 떠오릅니다. 때가 되었는데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서로 살폈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진 건 아닐까, 땔감이 없는 것은 아닐까, 혹시 아파서 누워있는 것은 아닐까를 살폈지요. 굴뚝의 연기만 보고도 서로의 안부를 헤아리며 지냈습니다.
댓돌 위의 신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발이 너무 오래 안 보이면 밭에서 쓰러진 건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고, 신발이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그대로면 그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일부러라도 들러 안부를 살피고는 했습니다.
이제는 고독사가 드문 일도 아니어서, 우리나라에서 고독사로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이 하루 평균 11명이라고 합니다. 이 땅 어디선가 하루 11명의 누군가가 아무도 모르는 고독한 죽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고독사를 막기 위해 굴뚝의 연기를 살피고 댓돌 위의 신발을 살피는 일은 도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럴수록 관심의 사각지대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금 고독사를 막아내지 못하면 결국 우리 또한 고독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